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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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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열릴, 그 길이 손짓한다

청송~영양~봉화~영월 잇는 외씨버선길에 피어 있는 사람과 숲 그리고 문화
등록 2014-10-18 14:45 수정 2020-05-03 04:27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石壁欄干)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희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 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감을 어찌합니까?
몇만 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하늘 허공 중천(虛空中天)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 년(千年)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조지훈의 ‘석문’ 전문


일월산자생화공원. 1939년부터 가동된 용화제련소는 1976년 가동을 멈췄지만 2001년에 들어서야 겨우 오염원을 밀봉하는 조처를 거쳐 자생화공원으로 거듭났다(왼쪽). 시인 조지훈의 생가 호은종택이 있는 주실마을 전경. 마을이 배 모양이라 배에 구멍을 내
는 우물을 파지 않는다는 전통을 지키는 마을은 외씨버선길 6구간 조지훈 문학길의 종점이다.

일월산자생화공원. 1939년부터 가동된 용화제련소는 1976년 가동을 멈췄지만 2001년에 들어서야 겨우 오염원을 밀봉하는 조처를 거쳐 자생화공원으로 거듭났다(왼쪽). 시인 조지훈의 생가 호은종택이 있는 주실마을 전경. 마을이 배 모양이라 배에 구멍을 내 는 우물을 파지 않는다는 전통을 지키는 마을은 외씨버선길 6구간 조지훈 문학길의 종점이다.

사랑은 그리움의 씨앗이다. 지워지지 않은 그리움은 어떤 모습일까. 조지훈은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될 것이라 노래했다. 시인의 고향인 경상북도 영양의 산 일월산에 전하는 황씨부인당 설화는 시인을 만나 ‘석문’이라는 시가 됐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 년(千年)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가는 돌문이 있습니다”를 만나러 일월산으로 가는 길 아침은 눈부셨다.

사람이 가꾸고 사람을 보호해온 숲

일월산으로 들기 전 시인의 고향인 주실마을로 길을 잡는다. 가지 못한 여름과 이미 와버린 가을이 공존하는 날. 영양에서 봉화로 이어지는 아스팔트 길 주변 들판은 황금빛인데 산은 초록이 여전하다. 곳곳을 나락을 말리는 농부들에게 내주고도 여전히 한가한 아스팔트 길이 이내 숲 속으로 사라진다. 아침 햇살을 온전하게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숲이 주실마을 숲이다.

산에 기대고 산을 마주하고 터를 잡았지만 마을 앞을 흐르는 장군천이 만들어낸 빈 공간을 막아보고자 조성했던 숲은 200~300년 된 느티나무와 느릅나무가 서서히 초록을 벗고 있었다. 수백 년을 사람이 가꾸고 사람을 보호해온 주실마을 숲은 2008년 제9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선정의 이유는 ‘공존’이었다.

숲을 지나 주실마을로 들어서는 잘 닦인 길을 버려두고 코스모스의 유혹을 받아들여 둑길을 지난다. 조지훈 생가로 마을이 유명세를 타면서 마을 사람들이 조성한 꽃길이다. 키만큼 자란 코스모스는 빽빽할 정도로 잘 자라 바람이 없어도 지나는 이의 뺨을 애무한다.

둑길과 이어진 논두렁을 따라 마을로 들어서면 마을 앞에 붓을 닮은 문필봉과 연적봉이 있어 박사와 대문호가 난다는 게 풍수가들의 이야기다. 마을 앞 너른 들과 포근한 산세 그리고 맑은 시내… 무엇 하나 부족해 보이지 않는 자연환경이다.

조지훈이 태어난 생가인 호은종택과 자란 방우산장, 그리고 후대가 세운 조지훈문학관과 시공원… 온통 조지훈의 흔적으로 가득한 주실마을을 두고 사소한 오해로 빚어진 이별이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 년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가는 돌문’을 만나러 일월산으로 간다. 시인은 고향 영양의 산인 일월산에 전해져오는 설화를 ‘석문’이라는 시로 남겼다.

온통 조지훈의 흔적으로 가득한
일월산자생화공원에서 우련전까지의 외씨버선길 일곱째 길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길 안내 간판은 초행자를 위한 대티골 사람들의 배려이자 마을의 내력을 알려주는 가이드북이다(위). 외씨버선길 치유의 길에서 만나게 되는 소나무. 비록 굽을지라도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을 일깨워준다.

일월산자생화공원에서 우련전까지의 외씨버선길 일곱째 길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길 안내 간판은 초행자를 위한 대티골 사람들의 배려이자 마을의 내력을 알려주는 가이드북이다(위). 외씨버선길 치유의 길에서 만나게 되는 소나무. 비록 굽을지라도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을 일깨워준다.

어느 옛날 일월산 아래 황씨 성을 가진 처녀와 그를 사모하는 총각 둘이 살았다. 처녀는 두 총각 중 한 명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첫날밤. 사모관대를 풀기 전에 새신랑은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오다 창호문에 비친 칼을 보았다. 칼은 달빛에 비친 대나무잎이었지만 처녀를 사모한 또 한 명의 총각이 자신을 죽이러 왔다고 착각한 신랑은 그대로 도망을 쳤다. 신부는 족두리와 삼을 벗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서 기다리다 죽었다. 신랑은 다른 처녀를 만나 결혼했지만 자식들이 낳자마자 죽는 불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중에 그 연유가 죽은 황씨 처녀의 원혼 때문이었다는 것을 안 신랑이 뒤늦게 처녀의 원혼을 위로하고 사당을 짓자 신부의 주검은 홀연히 삭아 없어졌다고 한다.

외씨버선길 6번째 구간인 조지훈문학관의 종점인 주실마을에서 일월산을 지나 봉화로 이어지는 7번째 치유의 길까지는 연결 구간이다. 가는 길 곳곳에서 영양댐 반대 현수막이 조용히 한을 쌓아가고 있었다. 수달을 비롯해 사라질 운명에 처한 동식물에게 겨우 남은 터전조차 앗아가겠다는 영양댐이 공존을 위해 필요할까? 답은 일월산자생화공원과 일월산을 넘는 치유의 길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일월산자생화공원은 일제가 일월산에 수십 개의 광산을 개발하면서 설치한 용화제련소를 자연으로 되돌리려는 노력의 결과다. 제련소는 가동을 멈춘 뒤에도 수십 년 동안 방치되다가 2001년이 되어서야 겨우 폐광지역 오염방지 사업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자생화 64종 11만2천 본과 나무 1만1천 본을 심고 가꾸고 있지만 그렇다고 오염원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저 밀봉됐을 뿐이다. 시인 조지훈이 전해준 황씨부인의 설화는 사람을 향한 자연의 사랑을 그저 경제적 부로 재단하고 망쳐놓은 인간을 향한 황씨부인의 경고일지도 모를 일이다.

자생화공원을 뒤로하고 치유의 길로 가는 길 첫머리에서 용화리 3층 석탑을 만난다. 작은 집 뒤편 콩밭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는 탓에 자칫 지나치기 쉽다. 탑의 크기와 형식은 아마도 있었을 사찰의 규모 또한 작지 않았을 것임을 상상하게 하지만 탑은 신라시대 형식이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탑을 뒤로하고 아스팔트 길을 따라 걷는 길 해님과 달님 설화를 배경으로 한 버스 정류장이 반긴다. 해와 달에서 이름을 따온 일월산을 상징하기 위해 차용한 캐릭터다. 경북 내륙에서 가장 높은 탓에 동해에서 뜨는 해와 달을 가장 먼저 볼 수 있어 산 이름 또한 일월산이다.

길을 건너 작은 숲길로 들어섰다. 길은 반변천을 따라 아주 느릿하게 산으로 오른다. 발 아래 반변천은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햇살을 튕겨낸다. 짝을 찾는 풀벌레 소리, 그리고 햇살을 투영하는 탈색돼가는 나뭇잎과 투구꽃과 구절초 등의 자생화가 숲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황홀한 시간은 30여 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내 다시 만나는 포장도로는 일월산에 기대어 살아온 대티골 사람들의 길이다. 용화제련소가 번성하던 시절 영양읍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호사를 누렸다는 마을은 이후 오래도록 잊혀졌다.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 지켜내던 마을에 도시의 삶에 지친 이들이 더해지면서 마을은 다시 활기를 찾았다. 채광이 중지된 일월산은 제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옛 기억을 더듬어 골짜기와 능선의 이름을 찾아내고 약초와 산나물을 캐러 오르내리던 길을 복원했다. 그 숲길이 10번째 아름다운 숲길 어울림상을 받았다. 화전에 울릉도와 강원도에서나 자라는 명이나물을 키우고, 화전민을 집단 이주시키느라 지어졌던 블록 벽돌집은 황토방으로 다시 지었다. 여기에 사람들의 건강을 위한 좋은 먹거리를 내면서 마을은 환경과 생태 우수마을로 선정됐다.

작은 풍경들은 큰 감동으로 가슴을 울리고

마을이 변하면서 다시 찾아드는 사람들은 산의 돌을 캐고 나무를 베는 이들이 아니라 산에 고마움을 표하는 사람들이었다. 외씨버선길 또한 일제가 용화제련소에서 제련된 광물을 운송하기 위해 열고 일월산 자락의 울울창창한 나무를 베어내기 위해 넓힌 31번 옛 국도를 자연과 공존하는 방법을 찾는 이들을 위한 걷는 길을 따른다.

자연치유 생태마을 대티골 간판을 지나면 길은 다시 두 갈래다. 왼편 시멘트 포장도로는 대티골로 오르는 길이고 왼쪽 너른 흙길이 옛 31번 국도다. 어느 길로 오르든 치밭목에서 만나고 외씨버선길은 이내 봉화 땅과 만난다.

흙길로 접어들었다. 자동차 한 대가 너끈히 지날 수 있는 폭이 이 길이 한때 31번 국도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길을 일러주는 안내판과 외씨버선길 상징물이 길 초입에서 초행길의 낯섦을 지워준다. 그리고 땅에 바싹 붙은 크지 않은 오석에 새겨진 글 “이 길을 걷는 동안/ 나는 없습니다./ 바람과 구름과 나무/ 새들과 꽃들…/ 생명의 울림으로/ 가득합니다/”.

그 의미를 다시 새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저 느릿하게 오르는 길과 늘어선 나무들, 가끔씩 왼편으로 보이는 일월산의 모습. 그저 심심하기만 한 풍경이다. 그러나 이마에 땀이 맺힐 즈음이면 왜 사람들이 이 길을 찾는지에 대한 답이 구해진다.

모퉁이를 돌아들어도 언뜻 그저 고만고만한 풍경인 듯한 산길이지만 물들어가는 나뭇잎, 길가의 작은 꽃, 그리고 가로수처럼 늘어선 소나무들이 간직한 상처…. 걸어갈수록 눈에 들어오는 작은 풍경들은 큰 감동으로 가슴을 울린다.

마치 가로수처럼 늘어선 소나무는 자동차가 다니던 시절 입은 상처에 갈라지고 부러진 가지를 제 스스로 치유하며 자란다. 곧게 자라지 못했지만 푸름은 잃지 않은 나무들이 산의 주인이다. 길을 내느라 허물어진 비탈 바위를 부여잡고서도 자란다. 겨우 빛이 드는 양지에는 철이 지나서도 마침내 여름꽃이 피었다.

바람이 되고 기원이 되고 기다림이 되고

오르는 길 곳곳에서 무너진 벼랑에 돌을 쌓은 탑들을 만난다. 무너진 채로 그대로 있었다면 그저 돌덩이일 뿐일 테지만 돌 위에 돌을 쌓으면 바람이 되고 기원이 되고 기다림이 된다. 그 기원을 받아들이는 마음, 그것이 사랑일 터였다. 31번 옛 국도는 사람을 사람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이 큰 마음과 작은 손길을 보태 되살려낸 사람의 길이었다. 이렇다 할 현대식 시설 대신 허물어진 곳을 다듬고 무너진 돌을 모아 탑을 쌓아 기원하는 방법을 일러주는 길이다.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석문’의 첫 구절을 되뇌며 걷는 길. 그리고 만나는 칡이 밭처럼 많다는 칠밭목에서 대티골 아름다운 숲길로 내려서자는 유혹을 이기고 봉화 땅 우련전으로 간다. 짧은 산길을 지나면 이내 시멘트 포장도로와 닿는다. 오르면 일월산 정상이고 내려서면 다시 사람이 사는 도시로 가는 길이다. 화전민들이 일구던 밭은 대부분 낙엽송이 심어졌다. 그 나무들이 도열한 길을 따라 내려서는 길, 자동차들이 줄지어 일월산으로 오른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시인이 말한 황씨부인의 촛불 한 자루는 아직 꺼지지 않았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글·사진 윤승일 nagne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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