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나 제공
‘크래시 배기지’(Crash Baggage)라는 이탈리아산 여행가방이 있다. 이 하드 케이스는 표면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울퉁불퉁하다. 새로 산 여행가방이 비행기 수화물칸에서 치이거나 거리에서 이리저리 부딪혀 파이면 참 마음 아프다. 그런데 이 가방은 그럴 염려가 없다. 미리 손상돼 있는 것이다! 크래시 배기지의 슬로건은 ‘핸들 위드아웃 케어’(Handle without Care)다. 보통은 ‘주의해서 다루세요’라고 하는 데 비해 이들은 ‘막 다루세요’라고 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손상하는 것은 패션 영역에서는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가장 많이 손상되는 것은 단연 청바지일 것이다. ‘데미지드 진’, ‘디스트로이드 진’은 엄연하고 보편적인 장르다. 찢고, 가닥가닥 올을 풀고, 무릎이 훤히 보이도록 구멍을 내고, 거친 곳에 비비고, 페인트를 뿌리는 등 청바지를 손상하는 방법은 다양도 하다. 원래 질기고 튼튼한 미덕에서 출발한 청바지는 그것의 손상을 통해 거칠고 자유로운 이미지로 변모한다. 티셔츠도 일부러 목 부분이 축 늘어지도록 늘리고, 요즘은 좀이 슨 것처럼 잔구멍을 뽕뽕 낸 티셔츠가 유행이기도 한 것이다.
요리하는 친구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요즘은 도마 위에 요리를 올려 내놓는 경우가 많은데, 그 도마가 매끈한 새것이면 먹음직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멀쩡한 새 도마에 이리저리 칼집을 내고 불에 그을리기도 해서 제법 연륜 있는 도마로 만든다고 한다.
나무로 만든 가구에 착색하는 도료의 이름은 스테인(Stain)이다. 스테인은 ‘얼룩’이란 뜻이다. 스테인을 발라서 고재(高材)의 느낌을 내기도 하는데, 오래된 목재의 색깔이 짙은 것은 세월의 더께 때문이므로 이때 스테인의 용도는 말끔한 새 목재에 일부러 시간의 때를 덧입히는 것이라 하겠다.
철판은 녹이 슬면 바스라진다. 하지만 건축가 승효상이 지은 대학로 쇳대박물관은 사면이 붉게 녹슨 철판으로 돼 있다. ‘코르텐’이라고 불리는 이 강판은 구리와 크롬을 혼합해, 녹이 좀 슬도록 내버려두면 치밀한 피막층이 형성돼 더 이상 부식이 진행되지 않는다. 번쩍이는 철판이었다면 거대한 철가방 같았을 건물이, 의도적으로 녹이 슬게 한 코르텐 덕분에 깊이 있는 색감을 띠게 되었다.
TV 프로그램을 보다보면 회상 장면에서 필름이 손상된 옛날 영화처럼 화면에 죽죽 금이 가게 하는 경우가 있다(보통 ‘화면에 비가 내린다’고 표현한다). 디지털 촬영을 하는 이 시대에, 일부러 예스러운 느낌을 내기 위해 영상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을 때도 ‘앤티크 필터’라는 게 있다. 오래되면 바래는 필름 사진처럼, 디지털 사진을 일부러 바래 보이게 하는 장치다. 바랜 사진의 애틋하고 따스한 느낌을 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자, 이쯤 되니 일부러 멀쩡한 무언가를 손상해보고 싶지 않은가? 어른들에게 혼날 말이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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