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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해야만 보이는 무언가

취하라
등록 2015-01-17 15:45 수정 2020-05-03 04:27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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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하라/ 늘 취해 있어야 한다/ (…) 당신의 어깨를 짓눌러 땅으로 구부러뜨리는 시간의 끔찍한 짐을 느끼지 않으려면 늘 취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 술에든 시에든 덕에든 그건 당신 뜻대로/ 다만 취하기만 하라’

웹툰과 드라마에 나와서 유명해지기 전부터, 나는 보들레르의 시 ‘취하라’를 곧잘 읊곤 했다. 한번은 술자리에서 기분이 좋아 또 ‘취하라’를 읊어댔는데, 다음날 출근했더니 후배가 인터넷에서 찾은 시 전문을 보여주며 말했다. “전혀 다르잖아요. 간밤에 선배가 읊은 시랑은.” “아, 그런가.” “그런데 난 선배가 읊은 게 더 좋았어요.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이런, 내가 술에 취해서 주절주절 되는 대로 떠든 시가 보들레르의 것보다 나을 리는 없으니 후배도 당시 많이 취해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 뒤 거의 10년이 지났고 나는 회사를 그만둔 지도 오래됐지만 후배 김민철(책 의 저자)과 나는 더없이 좋은 술친구로 지금도 잘 지내고 있다.

서울 종로구 적선동에 있는 조그만 술집인 ‘적선술집’의 메뉴판에 적힌 시가 떠오른다.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 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김영승, ‘반성 16’) 그렇다. 취해야만 보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비트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인 윌리엄 버로스의 처녀작 는 약물중독 경험을 다룬 고백적 자서전이다. 거기엔 이런 말이 나온다. “약의 효과는 특별한 각도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다. 노화해가고, 조심스러우며, 걱정 많고, 겁먹은 육신의 주장에서 순간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자유다.”

1960년대의 히피들은 대부분 취해 있었다, 술과 약물과 사랑에. 그 시절 환각제의 사용을 권장하고 그 효과에 대해 하버드대학에서 진지하게 연구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히피 이론가’라 불리는 마약쟁이 티머시 리어리 교수다(이 연구로 인해 그는 하버드대학에서 쫓겨났다). 그는 “Turn On(환각상태에 도달하여), Tune In(깨달음을 얻고), Drop Out(기존으로부터 빠져나오라)”이라는 반문화 슬로건을 내걸고 환각제를 통해 정서와 정신을 고양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의 소설 맨 앞 장에는 이런 제사(題詞)가 있다. “그들은 내게 말했다. 넌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 때문에 미쳐버린 거야.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인생의 참맛은 그런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걸. -야피, 라우드 알 라야힌” 나는 환각제를 써본 적은 없지만 술에 취하거나 사랑에 취해본 적이 있으므로 고개를 끄덕인다. 암, 인생의 참맛은 그런 사람들만이 알고 있지.

새로운 해가 밝았다. 이 쫀쫀하고 사람을 죽도록 쥐어짜는 나라에서도, 어떻게든 취하는 한 해가 되시길 기원한다. 그러나 무엇에? 술에든 시에든 덕에든 음악에든 자연에든 사랑에든, 그건 당신 뜻대로.

김하나 저자·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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