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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보단 가슴

‘머리가 비었다’
등록 2014-10-26 15:34 수정 2020-05-03 04:27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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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에 에어헤드(airhead)라는 말이 있다. 두뇌가 있어야 할 자리에 공기만 들어찬 머리. 멍청이라는 뜻이다. 우리 속어에도 ‘머리가 비었다’는 표현이 있다. 머리가 빈 것은 부정적인 뜻으로 많이 쓰인다. 하지만 분명 머리를 비워야 할 때도 있다.

만화 에서 농구 감독인 안 선생님은 작전 타임에 북산고 선수들을 불러놓고 말한다. “생각이 지나친 건 좋지 않아요. 발이 멈춰져버리니까.” 같은 작가의 다른 만화 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마음이 무언가에 사로잡히면, 검은 뽑히지 않는다.”

신중하고 머리에 든 게 많은 것이 항상 미덕인 건 아니다. 때론 머리를 비우는 것이 좋은 아이디어다. 이성과 의식의 족쇄를 적절히 풀어주는 것은 감각, 직관, 본능이 활발히 피어오르게 한다. ‘머리보단 가슴’이란 말도 많이들 하지 않는가. 많은 예술가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가장 적극적으로 실험한 사람들은 브르통, 콕토, 달리, 에른스트 등 초현실주의자들일 것이다. 프로이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들은 오토마티즘(자동기술법) 등의 기법으로 의식의 개입 없이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하고 그것을 그대로 표현하려는 시도를 많이 했다. 의식적으로 의식을 막은 것이다.

최근 요가(사진)를 시작했는데, 요가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계속 하신다. “머리를 비우세요. 아무 생각도 하지 마세요. 호흡에만 집중하세요.” 요가는 특정한 자세로 몸과 마음을 수련해 ‘무아지경’으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무아지경이란 정신이 집중돼 스스로를 잊고 있는 경지를 뜻한다. ‘나’라는 의식을 잊고 우주와 합일되는 경지인 것이다. ‘나’라는 의식 또한 번뇌다.

미국 뉴욕 유명 레스토랑의 분주한 주방을 엿볼 수 있는 책 에는 이런 부분이 나온다. “‘(새로 투입된 직원에 대해) 안타깝게도 그녀는 시집을 낸 시인이에요.’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하냐는 투였다. ‘생각이 너무 많아요.’” 요리책으로는 요리를 배울 수 없다는 말도 나온다. 어떤 느낌, 냄새를 기억에 저장될 때까지 반복해서 몸으로 경험하는 것만이 진정한 수업이라는 것이다.

다음은 구광렬의 ‘자벌레’라는 시의 부분이다. “자벌레는 한 발자국이 몸의 길이다/ 한 발자국을 떼기 위해 온몸을/ 접었다 폈다 한다/ 자벌레라 불리지만 거리를 재지도/ 셈을 하지도 않는다/ (…) 한 발자국이 몸의 길이인 자벌레는/ 모자라는 것도 남는 것도/ 모두 다른 몸의 것이라 생각하며/ 몸이 삶의 잣대인 자벌레는/ 생각도 몸으로 하기 때문이다”

머리에만 뭔가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머리를 잘 비우면 몸에 무언가가 깃든다. 그것은 종종, 머리에 든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김하나 저자·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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