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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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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짐처럼 강렬한 환기는 없다

없애버리기
등록 2015-01-31 13:55 수정 2020-05-03 04:27

가전제품 브랜드인 다이슨은 뭔가를 없애버리는 데 선수다. 세계 최초로 먼지봉투 없는 청소기를 만든 회사가 다이슨이다. 청소기로 유명해진 다이슨은 2009년,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할 발명품을 내놓는다. 바로 날개 없는 선풍기다. 이 선풍기는 선풍적 인기를 모으며 다이슨의 새로운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참 놀랍기 그지없다. 당신이 선풍기 디자이너나 엔지니어라고 생각해보자. 모든 것을 새롭게 디자인할 수 있다 해도 선풍기를 선풍기이게 하는 핵심 원리라 할, 빙글빙글 돌아가는 날개를 없앨 생각은 정말이지 하기 힘들 것이다.

메종마틴마르지엘라에서 나온 시계가 있다. 금속으로 된 밴드가 있고 동그란 시계 테두리가 있고 시간을 맞추는 용두도 있다. 그런데 정작 시계판이 없다! 시계가 꼭 시간을 보기 위한 기계라기보다 액세서리의 개념이 더 강해진 요즘, 시계의 요소만 가져오고 시계를 없애버린 위트 있는 팔찌를 만든 것이다.

영화음악 감독이자 기타리스트인 이병우가 개발한 기타가 있다. 보통의 기타는 길쭉한 지판이 있고 한쪽엔 넓적한 보디가 있지만 이 기타엔 보디가 없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이 기타의 이름은 기타바(Guitar bar)다. 덩치가 작으니 들고 다니기 쉽고, 소리는 앰프를 통해 크게 낼 수 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일렉트릭 기타의 보디 부분의 전신은 어쿠스틱 기타의 울림통이다. 현의 진동을 아날로그 방식으로 증폭시키던 부분이니 일렉트릭 기타라면 필요에 따라 없앨 수도 있을 것이다.

서체의 역사를 따라가다보면 19세기 들어 드디어 세리프(획 끝부분의 삐침)가 없는 산세리프(Sans-serif) 서체(고딕체)가 등장한다. 초기 산세리프 서체는 ‘그로테스크’라고 불렸다. 당시로서는 세리프를 없앤 모양이 너무도 생소하고 기묘하게 보여서 붙은 이름일 것이다. 그 정도로 이전의 서체와는 판이한 존재여서, 산세리프의 등장은 지금 보면 무슨 프랑스혁명처럼 충격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제 산세리프 서체는 어마어마하게 광범위한 서체 가족을 거느린 거대한 산맥이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아이디어’라고 하면 무언가를 새로 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여기던 것들을 없앰으로써 새로운 것을 탄생시킬 수 있다. 우리 주위에도 그런 것은 무수히 많다. 뼈 없는 순살 치킨, 무테 안경, 디카페인 커피, 씨 없는 수박, 끈 없는 브라, 미러리스 카메라, 무선 인터넷 등등.

얼마 전 달력 선물을 받았다. 슬로워크라는 디자인회사에서 만든 이 달력의 첫 장에는 ‘기억하라 그리고 살아라’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365일 중 단 하루, 4월16일만 표시돼 있지 않았다(사진). 15와 17 사이, 비어 있는 곳을 보는 순간 무언가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보통은 강조를 하기 위해 어떤 장치를 더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라진 16만큼 강렬한 환기는 없을 것 같다. 4월16일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넣는다.

김하나 저자·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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