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코미디언 중 하나일 엘런 드제너러스는 2007년 제76회 아카데미 시상식 진행을 시작하며 이런 얘기를 했다. “저에겐 참 대단한 밤입니다. 전 요만한 꼬마일 적부터 언제나 아카데미 시상식을 진행하고 싶었어요. 그러니 꿈이 이루어진 거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카데미에서 상을 타기를 원하지만, 저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진행하기를 원했지요. 그러니 어린이 여러분, 여기서 교훈을 얻으세요. ‘목표를 낮춰 잡을 것’(Aim lower).”
얼마 전에 강원도에서 낸 광고를 보았다. “온 국민과 함께 이루어낸 쾌거, 선진국 도약의 관문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이제는 강원이 세계의 중심입니다.” 어이쿠, 실소가 터져나왔다. 소치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렸다 해서 소치가 속한 크라스노다르 지방이 세계의 중심이 되었던가? 아니, 누가 그 지명을 알기나 하나?
우리나라 지자체들은 툭하면 세계의 중심이 되고 싶어 한다. 서울 용산 곳곳엔 이런 슬로건이 붙어 있다. “세계의 중심, 이제는 용산시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게 생긴 구청 건물이 있는 곳을 세계의 중심으로 삼기로 유엔이 결의하지 않는 한 용산이 그렇게 될 턱이 없다.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21세기엔 ‘세계의 중심’이란 말 자체가 너무 구린 것이다. 경기도의 슬로건은 “세계 속의 경기도”이고, 전남 여수의 슬로건은 “세계로 웅비하는 4대 미항 여수”다. 글쎄, 너무 거창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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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의도를 지나는데 “전국 4대 빙수 □□빙수”라고 써붙여놓은 집을 보았다. 빙수깨나 좋아하는 나도 단 한 번도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곳이었다. 나라면 이곳에 가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그렇게 표방하는 집치고 잘하는 집 못 봤기 때문이다.
자신감을 갖는 건 좋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자신감은 뜬구름이 된다. 팥빙수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뜬구름을 살짝 누른 단팥죽집 이름 하나를 소개한다. “서울서둘째로잘하는집.” 뭐, 소개할 필요도 없이 이미 유명한 집이다만. ‘세계’나 ‘전국’이 아니라 ‘서울’로 범위를 좁혔고, ‘첫째로’가 아니라 ‘둘째로’에서 무릎을 치게 된다. 묘하게 궁금하고 믿음이 가는 이름이다.
1976년부터 1980년까지 단 4년 남짓 발행되며 우리나라 잡지계의 역사를 통째로 바꿔놓은 전설적인 잡지 의 발행인 고 한창기 선생은 뛰어난 카피라이터이기도 해서 광고 카피를 직접 쓰는 일이 잦았다. 어느 것 하나 눈을 사로잡지 않는 것이 없는데, 그중 내가 보고 웃음을 터뜨린 헤드라인이 있다. “이달치도 좀 볼 만합니다.” 하하하, 이 자신만만하면서도 겸손한 척 ‘좀’을 붙여 누그러뜨리는 솜씨라니. ‘국내 최정상의 잡지!’ 따위보다 얼마나 여유로운가. 잡지를 사러 가고 싶지 않겠느냔 말이다.
엘런 드제너러스의 말을 기억하는가? 목표는 낮게. 어깨에 힘을 빼고, 조금 낮은 곳을 겨냥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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