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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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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믿는다, 여행은 사람을 바꾼다

작가들의 여행기 <여행할 권리> <히말라야 환상방황> <다른 길>과

함께 걷고 웃고 수다 떨며 찾아가는, ‘어떻게 여행할까’에 대한 해답
등록 2014-06-12 14:59 수정 2020-05-03 04:27

여행정보서가 ‘어디로 여행 갈까’에 대한 해답을 준다면, 작가들의 기행문은 ‘어떻게 여행할까’에 대한 해답을 준다. 오랫동안 길을 떠나본 사람은 안다. 결국은 ‘어디로 떠날까’보다 ‘어떻게 떠날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여행의 장소보다 중요한 건 여행을 떠나는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물론 수십 권의 여행기를 읽어도 단 한 번 여행을 떠나는 체험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간접경험이 직접경험에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간접경험이 직접경험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영화 의 명대사처럼,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걷는 것의 차이는 너무도 크기에. 하지만 길을 안다 해도, 반드시 그 길로만 걸으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길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들이 다른 길을 선택하는 용기를 낼 수도 있다. 여행기를 읽는 행위는 단순한 대리만족이 아니라 ‘나는 어떻게 이 작가와 다르게 걸을 것인가’에 대한 성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행기를 통해 ‘가보지 않은 장소’만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만나지 못한 작가’와도 만나 그와 함께 걷고, 마시고, 웃고, 수다를 떤다.

고뇌 어린 여행 기록, 김연수

여행을 떠나서도 끊임없이 ‘나는 어떻게 써야 할까’를 고민하는 작가 김연수의 고뇌 어린 여행의 기록이다. 이 책의 제목 자체가 매력적이다. ‘여행할 권리’라는 제목을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빙긋 웃음이 나온다. 여행을 인간의 특권이나 욕망이 아니라 당연하지만 우리가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권리’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여행은 놀이의 일종이 아니라 인권의 일종이 아닐까. 그에게 여행은 휴식이 아니라 작가로서 마음의 경계, 문화의 경계, 시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수행처럼 보인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데다 북쪽은 서로에게 총구를 드리우는 철조망으로 가로막힌 우리에게, 경계를 넘는 일은 뭔가 불온하고 위험하며 오싹한 금기를 깨는 엄청난 모험처럼 느껴져왔던 것이다. 그에게 국경을 넘는 일은 ‘고작 이것뿐이야? 이게 다란 말이야?’라는 질문을 입속에 꽉 깨문 채 하루하루를 수많은 닫힌 경계 안에 살아야만 했던 한국인으로서 자기부정의 몸짓이기도 하다.

나는 음흉하게 웃었다. 결국 돌아올 테니까. 갈 곳이 없으니까. 우리에겐 국경을 넘어 다른 민족 속으로 들어가, 이윽고 사라지는 유전자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세계를 향해 떠난 뒤, 거기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선조들이란 도무지 우리에겐 없으니까. 결국 모두 돌아왔으니까. 결국 자살이 아니면 월북뿐인 셈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비행기나 선박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 수평선 안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란.
-김연수, 중에서

김연수는 자못 진지하고 심각하게, 때로는 통렬하게 ‘비행기나 선박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서는 국경을 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닫힌 상상력’을 벼랑 끝에 세운다. 그는 국경을 부정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국경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국경의 보호를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단지 나인 채로 어떤 굳건한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 어떤 전향도 필요 없이 국경을 넘을 수 있다는 자기확인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내게는 국경이 필요했다. 국경에 가서 아무런 사상의 전환 없이도, 혹은 어떤 권리도 포기하지 않은 채, 내 다리로 월경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비겁자가 아닌 몸으로도 얼마든지 국경을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는 러시아 우수리스크, 일본 나고야, 독일의 밤베르크와 프랑크푸르트,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클리, 중국 지린성 룽징, 허베이성 후자좡 마을, 일본 도쿄 등에 체류하며 만났던 김연수의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처럼 고민 많고 진지하며 어딘가 어리숙해 더욱 사랑스러운 친구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이 담담한 여행기는 여행이란 결국 타인의 장소를 통해 타인의 삶을 만나는 일임을 깨닫게 한다.

온갖 변수와 우여곡절, 정유정

단편이 아닌 오직 장편만으로 소설가의 여정을 탄탄히 쌓아올린 작가 정유정은 욕망의 폭주기관차 같았다. 취미가 복싱이고, 매일 저녁 야산을 산책하며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그녀는 소설계의 여전사였고, 어떤 일에도 지치거나 실망하지 않을 것 같은 강인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녀가 처음으로 ‘소설 쓰는 일이 흥겹지 않다’고 느낀 것은 을 쓴 직후였다고 한다. 간호사로 일할 때조차 한 번도 ‘소설 쓰지 않는 나’를 상상해본 적이 없는 그녀에게 견딜 수 없는 슬럼프가 찾아왔다. 강철 같은 체력과 지칠 줄 모르는 영혼의 엔진을 지녔던 그녀가 알고 보니 한 번도 한국을 떠난 적이 없는 자타 공인의 ‘토박이’였다는 점도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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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녀의 첫 번째 외국 여행 장소가 안나푸르나라는 것은 역시 그녀다운 선택이다. 야생의 사유, 투쟁의 글쓰기를 일삼는 그녀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안나푸르나는 관광지이기보다 자발적인 고행의 공간이다. 그녀가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안나푸르나행을 결정하는 장면은 여주인공 노라의 가출처럼 드라마틱하다. 이 장면은 모든 여행자의 가슴에서 꿈틀거리는 본능적 일탈의 열망을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히말라야를 ‘환상종주’(circuit)하겠다는 그녀의 야심찬 프로젝트는 현지의 온갖 변수들과 여행자의 우여곡절로 ‘환상방황’으로 변해버리지만, 바로 그런 못 말리는 예측 불가능성이야말로 여행의 매혹적인 본성이다.

욕망이라는 엔진이 꺼져버렸다. 이야기 속 세계, 나의 세상, 생의 목적지로 돌진하던 싸움꾼이 사라진 것이었다.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에 대한 대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저 혼란스러웠다. 책상 위에 쌓아둔 다음 소설 자료와 책, 새 노트가 신기루처럼 비현실적이었다. 덮쳐오는 허망함에 당혹을 넘어 공포를 느꼈다. 누군가 내 상태를 알아차릴까봐.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하게 될까봐. 고작 소설 몇 편 쓰고 무너지는구나, 싶어서. 나는 강아지처럼 낑낑대다가 끝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무슨 일이야?”
안방에서 코를 곯며 자던 남편이 벌떡 일어나 뛰어왔다. 나는 코를 풀며 대꾸했다.
“나 안나푸르나 갈 거야.”
선택사항이 아니야. 생존의 문제라고.
-정유정, 중에서


가난한 토착민의 삶 속으로, 박노해


길을 잃어버리자, 그 길이 나를 찾아왔다.
아주 오래전부터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길에서 만난 그 땅의 사람들이
나의 살아 있는 지도였고 나의 길라잡이였다.
눈부시게 진보하는 세계와 멀어져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는
험난한 곳에서 자급자족의 삶을 이어온 전통마을 토박이들.
자신이 무슨 위대한 일을 하는지 의식하지도 않고
인정받으려 하지도 않고, 인류를 먹여 살릴 한 뼘의 대지를
늘려가고자 오늘도 가파른 땅을 일구어가는 개척자들.
(…)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고 마치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잊혀지고 무시되고 있지만, 이들이야말로
누구보다 이 세상 깊숙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박노해, 중에서

가 나와 비슷한 취향과 성향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작가의 여행기라 반갑고 친밀한 느낌을 준다면, 은 나와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작가의 도전적이고 격정적인 여행기라 호기심과 흥미를 자극한다. 은 내가 도저히 모방할 수도 따라잡을 수도 없는 여행의 신기원을 보여준다. 박노해는 ‘색다른 풍경’을 찾기보다 ‘다른 길을 이미 매일 걷고 있는 사람’의 현장으로 성큼 들어간다.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라오스, 버마, 인도, 티베트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볼거리를 찾아나서는 여행이 아닌, 오직 힘겹게 땅을 일구고, 광활한 바다를 지키며, 하늘을 이불 삼아 살아가는 가난한 토착민들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간 그의 사진과 에세이는 여행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신적 깊이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거의 모든 사진들이 흑백사진이라는 사실도, 그의 글쓰기가 어느덧 산문과 운문의 경계조차 뛰어넘는 제3의 무엇으로 변모해가고 있다는 사실도 경이롭다. 그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진전 ‘다른 길’을 통해 또 하나의 새로운 출발을 증언한 그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길고, 질기며, 지난한 투쟁을 시작한 듯하다.

평범한 곳을 특별하게 만드는 심리적 마술

나는 믿는다. 시간은 사람을 바꾸지 못하지만, 장소는 사람을 바꾼다는 것을. 여행에 진정으로 중독된 사람들은 특정 장소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장소에 가면 그 장소에 맞게 자신도 모르게 놀라운 화학변화를 일으키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같은 장소에 있으면 아무리 시간이 오래 흘러도 늘 올빼미형 인간이던 내가, 여행만 가면 아침형 인간으로 변해버린다. 전혀 힘들지 않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여행지에서는 햇살이 창틈에 스며드는 순간, 눈이 반짝 떠진다. 이 놀라운 장소들을 뼛속 깊이 흡입하고 싶은 열망에 불타서 나도 모르게 바지런해지고, 경쾌해진다. 바지런과 경쾌라니. 평소의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다. 평소엔 좀처럼 잘 웃지도 않는 내가 여행만 떠나면 넘치는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는 철딱서니 없는 피터팬이 되어버린다. 가장 좋은 점은 하루 24시간을 정말 알차게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내 몸의 변화, 내 마음의 변화에 어느 때보다 예민해지기 때문에, 햇살의 표정, 바람의 몸짓에도 아주 미세하게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의 풍경 하나하나가 더없이 소중하고 애틋해진다. 영화 에서 춘희(심은하)가 네 손가락으로 카메라 프레임을 만들어 마음의 사진을 찍는 장면처럼, 그렇게 가상의 액자를 만든다는 것은 평범한 장소조차 특별한 장소로 만드는 심리적 마술이다. 여행기의 마법 또한 그렇게 손가락으로 카메라 프레임을 만드는 일을 닮았다. 작가들의 다정하고도 혹독한 여행기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면, 어떤 상투적인 장소들도 오직 나에게만 다른 빛깔로 보이는 마법의 사진처럼 특별해진다.

정여울 문학평론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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