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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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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하지 않기 위해 하는 외식

배고플 때 먹는 밥, 금방 해서 먹는 밥, 뽑아서 해먹는 밥…
맛난 밥의 조건들
등록 2014-05-23 15:15 수정 2020-05-03 04:27
텃밭에서 갓 딴 채소를 곁들인 집밥은 〈미슐랭 가이드〉의 식사가 부럽지 않다. 강명구 제공

텃밭에서 갓 딴 채소를 곁들인 집밥은 〈미슐랭 가이드〉의 식사가 부럽지 않다. 강명구 제공

얼마간의 흩어진 삶을 마치고 2000년 2월 모든 식구가 이곳에 다시 모여 도시와는 사뭇 다른 새로운 형태의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을 가장 감동시킨 사건은 자장면 배달이었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는 않지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친구들이 놀러왔다가 ‘동막골’이란 별칭을 붙여준 이곳은 20가구 남짓 사는 외진 곳이라 당시만 해도 중국집 배달은 그야말로 언감생심이었다. 어느 봄날이었던가 초등학생 여식들의 자장면 타령에 “설마, 배달을…” 하며 114에 중국집 번호를 물었다. 탕수육까지 덤으로 주문한 작전이 주효했는지 1시간 좀 못 돼 슬리퍼 신은 ‘배달맨’이 철가방을 들고 봉고 트럭에서 내리는 순간 나도 무르게 “우아” 하는 탄성이 나왔다. 10여km 떨어진 곳에서 배달된 ‘청(淸)요리’는 당연히 입에서 ‘녹았다’. 우리 가족이 ‘문명세계’와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확인한 순간이었고, 우리의 주거 이전 선택이 가히 그르지 않음을 보여주었으니 40대 중반 아비의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러나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자장면 감동’은 찾기 힘들어졌다. 자주 시켜 먹어서가 아니라, 비록 반쪽이라도 시골살이를 하다보니 입맛뿐 아니라 먹거리에 대한 자세도 절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환경의 변화가 이렇듯 아는 새 모르는 새 우리 가족을 변화시킨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아이들을 꼬드겨 시골로 올 때 선언한 “일주일에 한 번 서울 나들이, 한 학기에 한 번 해외여행”은 그야말로 공약(空約)이 되었다. 내게 정치가적 기질이 있어서라기보다 몇 번의 나들이가 있은 뒤 아이들 스스로 (풀을 뽑는 한이 있더라도?) 차라리 집에서 놀기를 원했기에 이제는 한 학기에 한 번 (해외가 아닌) 서울 나들이도 심드렁해졌다.

당연히 외식은 줄고, 속칭 ‘푸드 마일리지’(Food Mileage)라고 불리는 원산지로부터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식자재 배달 거리는 점점 더 줄어들게 되었다. 계절 따라 텃밭이나 산과 들로부터 조달하는 찬거리가 많아지고 직접 담근 장류로 기본적인 맛을 내다보니 절로 그리 된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외국산이 점령하거나 알록달록 색소로 치장한 찬거리가 점령한 마트에도 자주 가고 외식도 하지만 그 횟수와 내용에서 차이가 확연해졌다. 식후 케이크 한 조각 뒤의 블랙커피 한 잔이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듯이, 마트나 근사해 보이는 밥집이나 방송의 외식 프로그램이나 잡지의 맛집 소개 유혹을 거절하기 쉽지 않다.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시장 지배적 법칙이 우리네 먹거리에도 적용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제 밖에서 먹어본 뒤 집밥과 비교해보니 “외식하지 않기 위해 외식한다”는 수준까지 이르렀고, 텃밭의 신선함이 마트의 안개비 젖은 유기농보다 나음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끊을 수는 없지만 조절할 수는 있게 되었고, 목표점에 도달하지는 못하지만 다가설 수는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가끔씩 학생들에게 “어떤 밥이 가장 맛난 밥”이냐고 물어본다. 예상대로 “엄마가 해준 밥”이 최우선이다. 다음이 놀랍게도(?) “집에서 먹는 밥”이었다. “자기가 밥하면 저러겠냐”는 아내의 지청구를 한 귀로 흘리면서 여기에 내가 우리 집 아이들에게 이른 몇 가지 맛난 밥의 조건을 소개한다. “병곤아, 단비야, 푸름아. 가장 맛난 밥의 3대 조건은 첫째가 배고플 때 먹는 밥이고, 둘째가 금방 해서 먹는 밥이고, 셋째가 밭에서 뽑아서 해먹는 밥이란다. 물론 가족이 모여 같이 먹는 밥은 당연하고 말이야. 적당한 노동 뒤 시장기가 들 때, 밭에서 갓 수확한 신선한 재료로 즉석에서 조리해 식구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먹는 밥이 제일 맛나다는 말이다.”

이런 연유로 나는 식당에서 수저 대신 카메라를 먼저 들이미는 젊은이들이 난해하고, 교환학생으로 프랑스 파리에 간 푸름이가 찍어 보낸 식당의 “아빠가 꼭 먹어봐야 할 죽이는” 디저트에 심드렁하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좋은 것 골라 먹기보다는 나쁜 것 덜 먹기”를 제안하는 현실적 주장에 동의하고 “술과 목욕과 여자가 몸에 나쁘지만, 이것들이 없는 세상은 더 나쁘다”는 어느 방탕한 로마 귀족의 묘비명을 이해하는 너그러운 사람이다.

강명구 아주대 사회과학대학 행정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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