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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이 된 도둑들

장하준의 <사다리 걷어차기 >
등록 2014-05-04 07:25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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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를 생산하는 선진국과 면화를 생산하는 개발도상국이 있다. 두 나라는 상대적으로 더 우위에 있는 산업에 각자 특화해 자동차와 면화를 교역하면 모두가 행복해진다. 그러나 면화를 생산하던 개도국이 ‘우리도 자동차를 생산해보자’고 결심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필경 정부가 자동차 회사를 만들고, 각종 지원금을 통해 자동차 산업을 육성할 것이다. 이는 오늘날 당연한 신조처럼 받아들여진 자유무역론의 견해에서 보면 올바른 것인가, 아닌가.

오늘날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과 국제통화기금 등은 선진국이 자유무역과 정부 개입 축소, 민영화 등을 통해 성장했으므로 개도국들도 이런 제도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진실로 그러할까. 영국·미국 등의 선진국은 그들이 최근 다른 나라에 강요하는 제도를 통해 성장했을까. (장하준 지음)는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으며 오히려 정반대라고 말한다.

영국은 자국을 세계적인 공업국으로 이끈 모직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당시 모직산업이 더 발전해 있던 벨기에·네덜란드 등 저지대 국가로부터 모직 옷감의 수입을 금지하는가 하면, 자신이 지배하는 식민지의 수입품이 자국 상품을 위협할 정도로 품질이 좋으면 해당 물품의 수입을 중단시키기도 했다. 그 결과 인도, 아일랜드 등의 식민지에서 섬유산업이 붕괴되는 결과가 초래됐다. 다른 선진국들도 자국보다 앞선 나라를 추격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는데, 고율의 보호관세가 대표적이다. ‘자유무역의 화신’으로 불리는 미국은 급속한 산업화를 추진하던 1800년대 초반, 제조업 관세가 35%에 달했다. 이 세율은 날이 갈수록 높아져 1832년에는 평균 40%로 올라갔고, 철강과 섬유의 보호관세는 50%에 이르기도 했다. 뒤늦게 산업화에 뛰어든 일본은 다른 강대국들의 강압에 굴복해 고율 관세를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조선·채광·섬유·방위 산업에 국가가 직접 기업을 세우고 육성했다.

지적재산권에서도 선진국들은 지금 우리가 믿기 힘든 정책을 실시한 적이 있다. 영국은 자국의 기술이 다른 나라로 이전되는 걸 막기 위해 18세기의 약 100년 동안 기술인력의 이민을 금지했고, 다른 나라에서 기술자를 금전으로 유인하는 경우 법으로 처벌했다. 독일은 영국의 특허와 상표를 도용해 수출을 늘리면서도 스위스 기업이 자국 기업의 지적재산을 도용하는 것에는 격렬히 반발했다. 저자 장하준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한때 도둑질을 일삼던 이들이 하나씩 파수꾼이 된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단순하다. 오늘날 선진국들은 자신이 개도국에 강요하는 자유무역이나 정부 개입 축소 같은 정책이 아니라 자신들이 비판하는 정책, 예를 들어 보호무역이나 산업에 대한 정부 지원, 정부 주도의 기술 육성, 산업 국유화 등을 통해 성장했다. 그런 ‘사다리’를 통해 정상에 도달한 이들이 이제 개도국 앞에 있는 사다리는 걷어차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눈부신 성장 역시 선진국들의 초기 궤적과 유사한 면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자유무역이 당연한 것만은 아니라는 합리적 주장이 궁금하신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김종철 전 노동당 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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