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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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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발리우드

개봉 앞둔 <런치박스>로 살펴본 최근 인도 영화의 경향
화려한 군무 대신 서사를 무기로 내세운 또 하나의 조류
등록 2014-03-28 15:01 수정 2020-05-03 04:27
*영화 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도에는 수많은 ‘왈라’들이 있다. 인도를 방문한 적이 있다면 만나지 않을 수 없었을,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개조한 인력거를 모는 릭샤왈라를 비롯해 길에서 인도 전통차 ‘차이’를 파는 차이왈라, 인도식 요구르트를 파는 라시왈라, 빨래공 도비왈라 등등. 한국어로 ‘~꾼’ ‘~장사’ 등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를 이름 뒤에 붙인 이들은 인도라는 거대한 시장을 촘촘히 메우며 움직인다.

4월10일 개봉 예정인 영화 에는 다바왈라가 등장한다. 매일 아침 움직이는 5천여 명의 다바왈라는 인도의 경제 수도 뭄바이에서 도시락을 배달하는 이들이다. 집에서 만든 도시락(다바·Dabba)을 왈라들이 수거해 직장의 가족에게 배달하고 점심시간이 끝나면 빈 도시락을 회수해 집으로 가져다준다. 영화는 흰 모자를 쓰고 흰 옷을 입은 다바왈라 무리가 각 가정에서 도시락을 받아 자전거를 타고, 기차를 타고 배달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자전거 짐칸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도시락이 사람과 자동차가 뒤섞인 복잡한 도로 한가운데 누락되지 않을까 보는 이의 마음은 조마조마하지만, 인도에서 120년이나 이어지고 있다는 이 전통은 100만 개의 도시락 중 단 1개 정도만 잘못 배달될 정도로 정확한 시스템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런 데서 시작하게 마련이다. 100만분의 1 확률의 실수가 발생했다.

노래와 춤이 없어도 인도 영화?

밖에서는 활기차지만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말이 없는 남편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일라(님라트 카우르)는 이웃에 사는 아주머니의 도움을 얻어 평소보다 맛있는 도시락을 싼다. 하지만 회심의 역작이라 생각했던 도시락은 다른 사람에게 배달된다. 도시락을 받은 이는 곧 은퇴를 앞두고 있는 회계사 사잔(이르판 칸). 사잔은 아내를 잃고 인생에 별다른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사람들과 벽을 쌓고 지낸다. 그가 생각하기에 앞으로 그에게 남은 것은 잦아들고 사라질 삶의 시간뿐이다. 하지만 잘못 배달된 도시락이, 35년간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은 업무처럼 기계적이던 그의 일상에 균열을 가져온다. 사잔과 일라는 도시락 편지를 주고받으며 각자의 처지를 털어놓고 위로하며 점차 가까워진다. 그런 와중에 일라는 남편의 외도를 확인한다. 일라는 딸과 함께 부탄으로 떠나기로 마음먹고, 사잔은 용기를 내 그 길에 합류하고 싶다고 전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만나보지도 못한 채 각자의 처지에 따라 마음과 시선이 엇갈린다. 그래서 결국 이들은 함께하게 되었을까.

이야기의 구조는 이렇듯 단순하다. 영화는 달리는 기차에 올라탄 사잔을 마지막 장면에 담으며 열린 결말을 보인다. 사잔과 일라는 만날 수도 혹은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각자 어떤 선택에 의해 올라탄,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전혀 예정에 없었던 기차에 몸을 싣고서 뜻하지 않은 목적지에 도달해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다. 이들에게 다가올 나날이 오늘보다 좋은 내일일 것 같은 이유는 영화 전반에 깔려 있는 긍정성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우연이 빚어낸 동화 같은 이야기에 소소한 철학적 시선을 담아 전달한다.

그런데 국내 개봉한 인도 영화를 몇 차례 경험한 관객이라면 를 보고 ‘어라?’ 할 수도 있다. 의 러닝타임은 104분, 2~3시간 상영은 기본인 기존에 소개된 인도 영화와 비교하면 이 영화는 소품에 가깝다. 화면을 뚫고 등장하는 현란한 군무와 노래도 없다. 주인공 일라와 사잔은 결코 노래하고 춤추지 않는다. 인도에서는 매년 그 땅의 수많은 신만큼 많은 영화가 제작되고, 영화 색깔 또한 제작되는 지역의 문화에 따라 특성을 달리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뭄바이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이른바 ‘발리우드’ 영화다. 인도 내에서도 가장 활발히 제작되는 발리우드 영화는 긴 러닝타임, 뮤지컬 형식, 해피엔딩, 한 영화 안에 다양한 장르가 집결되는 등의 특징을 가진다.

최근 몇 년 사이 국내에서 개봉한 등은 발리우드 영화의 특성을 갖고 있지만 노래와 춤보다는 서사를 강조한다. 는 이마저도 넘어 아예 춤과 노래를 생략했다. 국내 개봉되는 인도 영화 대부분은 인터내셔널 버전 혹은 국내 배급업체가 감독과 상의해 편집한 버전으로 원작품보다 분량이 짧다. 는 한 장면도 삭제하지 않고 2시간이 채 되지 않는 분량에 이야기를 모조리 담아냈다. 발리우드 영화의 공식 중 여러 개가 무너진 셈이다. 이를 인도 영화의 경향 변화로 읽을 수 있을까.

인도 영화의 또 다른 트렌드

인도 영화 블로그 ‘메리데시넷’(desinet.tistory.com)을 운영하는 라즈베리씨는 발리우드 영화의 특성을 벗어난 또 하나의 인도 영화 조류에 관해 설명했다. “마살라 영화(Masala·수많은 재료가 섞인 인도 향신료로 춤·노래·이야기 등의 다양한 요소와 여러 장르가 한 영화 안에 담겨 있음을 빗대어 부르는 용어)는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다. 한편으론 이른바 ‘탈마살라’ 영화도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지난해 현지에서 히트한 영화 중에도 140분 안팎의 영화가 많았다. 마살라 특유의 색을 강조하기보다는 안정된 드라마 내러티브 구조가 있는 영화다. 젊은 시네필들로 형성된 일군의 제작자·감독 그룹이 있는데, 의 제작자 중 한 명인 아누라그 카시아프 또한 그런 인물이다. 이들이 제작한 영화가 또 다른 풍미를 형성하면서 세대교체되는 분위기가 있다. 아직 주류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세력이 확장된다고 볼 수는 있다.”

영화 〈런치박스〉는 춤추고 노래하지 않고, 분량도 짧은 편이다. 대신 서사의결을 강조했다. 기존 발리우드 영화의 공식 중 여러 부분을 배제한 영화지만이 또한 인도 영화다. 많지는 않지만 국내 영화시장에 다양성을 더할 수 있는 또 다른 조류의 인도 영화들이 국내에 소개되고 있다.영화공간 제공

영화 〈런치박스〉는 춤추고 노래하지 않고, 분량도 짧은 편이다. 대신 서사의결을 강조했다. 기존 발리우드 영화의 공식 중 여러 부분을 배제한 영화지만이 또한 인도 영화다. 많지는 않지만 국내 영화시장에 다양성을 더할 수 있는 또 다른 조류의 인도 영화들이 국내에 소개되고 있다.영화공간 제공

기존 발리우드 영화가 시청각적 자극을 통해 영화적 환상을 보여주며 2~3시간 동안 일상 탈출을 꿈꾸는 관객을 매혹했다면, 류의 영화는 리얼리즘을 강조해 현지인들의 소소하고 다양한 삶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래서 정광현 한국인도영화협회(KOIFA) 회장은 이런 종류의 영화가 국제 관객에게 더 큰 호응을 보인다고 말한다. “인도 현지에서 노래와 춤이 없는 영화가 멀티플렉스에서 상영되고, 이런 영화를 소비하는 인구가 조금씩 늘어 트렌드가 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서구 영화와의 차별점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 때문에 다시 춤과 노래, 인도식 스펙터클이 강화된 영화가 돌아오고 있다”고 전했다.

요약하면 국내에 수입되는 인도 영화의 경향이 일련의 변화를 보이는 듯하지만, 인도 현지에서 이 변화는 강력할 정도로 급진적이진 않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몰랐던 인도 영화의 새로운 조류가 조금씩 유입되는 것은 맞다. 전주국제영화제가 펴낸 책 은 “‘인도 영화는 모두 발리우드에 속한다’라는 잘못된 공식”이 국내에 만연해 있음을 지적했는데, 발리우드 영화는 인도 영화의 주류이긴 하지만 또한 인도 영화의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다.

국내에 수입된 인도 영화는 특유의 강한 색채로 이제까지 마니아층 중심으로 소비돼왔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추가한 새로운 결은 다른 취향의 관객들을 흡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발리우드에서 제작됐다고 하더라도 마살라 영화의 공식을 고스란히 따르지 않는 영화도 늘고 있다. 시야를 확장해본다면 발리우드 범주 밖, 타밀 지역이나 중부나 북부에서 제작되는 영화들도 주목할 만한 작품이 많다. 강민영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언어만 600개, 인도 정부가 공식적으로 채택한 언어가 10여 개에 달하는 넓은 나라에서 힌디어 하나로 모든 영화의 사조들을 통합할 수는 없다. 특히 영국 식민지 시절 영국 정부나 인도 중앙정부의 통치가 닿지 않았던 인도 남쪽의 주들… 특유의 지역적 특성을 살려 힌디어 영화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경향의 영화들”이 꾸준히 등장해왔다고 설명했다.

의외의 목적지에 도달할지도

에서 사잔의 일상에 또 다른 균열을 내는 인물로 등장하는, 긍정적이고 실수가 잦은 셰이크(나와주딘 시디퀴)는 영화를 압축하는 한마디를 한다. “잘못 탄 기차가 우리를 목적지로 데려다줄 수도 있다.” 계획한 대로가 아니더라도, 우연에 몸을 기대더라도 꼭 그래야만 했을 법한 일이 삶에서 벌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의외로 아주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한국 영화 아니면 할리우드 영화로 채워진 국내 영화 시장에서 어느 날 우연히 만난 타국의 영화는 우리를 또 다른 목적지로 옮겨줄지도 모른다. 더불어, 우리와 같고도 다른 일상을 살아가는 인도인들의 이야기가 국내 영화 시장에 다양성을 더할 수 있지 않을까.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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