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과학사를 권력 빼고 바라보면

클리퍼드 코너의 <과학의 민중사>
등록 2014-01-25 15:59 수정 2020-05-03 04:27
1

1

마젤란은 태평양을 발견하고 탐험한 최초의 항해자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 태평양 섬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마젤란보다 수천 년 앞서 대양을 항해했던 이들에게 그가 한 여행 따위는 이미 일상이었다. 유럽 문명 중심의 세계사에서 콜럼버스의 아메리카를 ‘발견’했다는 ‘역사적 착각’을 바로잡는 일은 과학사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갖고 간 것은 원주민 인구를 95%로 줄인 병균이었지만, 아메리카 대륙에서 넘어간 감자와 옥수수는 유럽 인구의 폭발, 나아가 중국 인구 폭발에도 기여했다. 이름 없는 농업혁명의 주인공을 잊고 우리는 콜럼버스를 ‘발견자’로 기억한다. 클리퍼드 코너는 (사이언스북스 펴냄)에서 이름 없는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해내고 불러낸다.

이름 없는 자의 호명은 이름 있는 자들을 역사적 맥락에 위치시키는 작업과 동시에 이루어진다. “아이작 뉴턴으로 시작하거나 끝나는 책이 몇 권이나 되는지 세어본 적이 있는가.” 과학사학자 베티 조 돕스는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이 책의 첫머리에도 끝에도 뉴턴은 등장하지 않는다. 저자는 뉴턴을 이렇게 다룬다.

과학적 개념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이지 않다.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각자 미적분학을 발견하고 다윈과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가 진화론을 동시에 내세운 것과 같이 “어느 비범한 사람이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또 다른 사람이 곧 찾아냈을 것이다”. 그래서 정작 알아내야 할 것은 이렇다. “어째서 그러한 생각들이 특정 시간과 장소에 나타나는가. 그것들은 어떻게 이미 존재하게 되었는가.” 뉴턴의 과업이라면 이미 확립된 하늘에서의 움직임과 땅에서의 움직임에 대한 법칙을 종합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추동해낸 것은 상업자본의 등장과 발달에 따른 역사적 결과였다.

저자의 ‘불손함’은 이런 폭로로도 이어진다. 뉴턴의 관심은 실용적인 관심에 머물렀다. 뉴턴은 친구에게 “헝가리의 켐니티움에서는 철을 황산 용액에 녹여서 금으로 바꾸어낼 수 있다”고 “헝가리, 스클라보니아, 보헤미아(…)의 산속에 금이 가득 차 있는 강물이 흐르고 있는지”라고 편지를 썼다. 이런 뉴턴의 ‘인간적 면모’와 달리 다른 역사적 전개 속에서 굳건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도 영국의 자본주의적 사회·경제적 맥락이 작동해서였다. 뉴턴의 냉정한 과학은 과학계 엘리트들과 잘 맞았다. 뉴턴주의는 혁명 투쟁에서 승리한 계급의 이데올로기였다. “만물박사의 시대는 18세기에 끝났다”며 과학을 전유하는 엘리트가 생겨났다. 이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이 엘리트의 이름을 나열하는 역사로 가득 찬 과학사였다. 역사 교과서 논쟁이 보여주듯, 기억전쟁의 승리를 거머쥐는 키워드는 권력이다. 뉴턴이 기억된 것은 그를 영구히 기억할 체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름 없는 자들의 과학사, 역사 교과서뿐만 아니라 과학도 다시 쓰여야 한다. 이 책이 그 결과물이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