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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번역 시대, 완전소중 번역론

등록 2015-04-04 17:22 수정 2020-05-03 04:27

이문구의 ‘월곡후야’의 발췌다. “업종을 따서 문필업이라고 애써 우길 수도 있을 일거리였으나, 사실 우리말 큰사전에도 오르지 않은 명칭의 직업이었다. 억지로 이름하면 세계명작개칠사 (…) 무등록 출판사의 덤핑 서점이 포갬포갬 몰려 있는 종로5가 뒷골목 한구석의 오죽잖은 한옥 (…) 그곳으로 출근한 희찬은 이미 이름 있는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온 소설책을 펼쳐놓고, 게다 띄엄띄엄 건성으로 읽어가며 마음 내키는 대로 변조하는 것이 일이었다.” 소설은 1970년대가 배경이다. ‘세계명작개칠사’라는 희찬이 하는 일이란 것은 세계명작들의 표현을 여기저기 짜깁기해 새로운 세계명작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조재룡은 (문학과지성사 펴냄)에서 그 풍경을 완전한 창작은 아닐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리고 이 ‘개칠사’라는 것이 생긴 연유를 문학평론가 조영일의 글에서 빌려온다.

“세계문학전집이라는 기획 자체에 무게중심을 두면, 우리는 도리어 경제적 발전 이전, 즉 4·19 혁명과의 관계에 주목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 사실 4·19 세대는 문화 및 출판계에도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는데, 그 바람은 그들이 일본어를 할 줄 모른다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민음사는 1998년 세계문학전집을 펴내며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4·19 세대에게 번역되어야 할 세계문학전집은 일본어를 벗어난 판본이었다는 것이다.

조재룡은 현재 번역가가 궁할 정도로 세계문학전집 붐이 일고 있다고 말한다. 이 붐의 이유는 일간지 등에서 다루어지는 바대로 명확하다. 1차로 1998년 민음사판이 발간 10년 만에 손익분기점을 형성하면서 국내 대형 출판사들이 전집 발간에 뛰어들었다. 수능 세대의 폭발적 수요가 붐을 거들었다. 조재룡은 이 전집 붐을 2차로 칭하고, 그 이전의 1차 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의 희소성은 여기에 있다. 저자는 잘 듣기 어려운 번역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 만화 등을 빌려오고 때론 시 패러디를 하며 재미지게 들려준다. 전집 이야기를 다룬 ‘번역 정글 잔혹사, 혹은 세계문학전집 번역 유감’의 절정은 앙드레 말로의 구절을 비교해, 이문구 소설의 희찬이 한 바와 같은 짜깁기가 실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심지어 한 출판사에서 같은 번역을 이름만 바꿔 펴냈음을 보여주는 명명백백한 증거는 그의 ‘특종’일 성싶다.

저자는 번역과 관련되는 사유는 문학과 관련되는 사유와 고스란히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번역이 만듦을 저버리고 ‘쓰다’의 실천을 도모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으며 타자의 언어와 나의 언어를 포개어보는 지난하고도 고달픈 작업에 필요한 이론적 탐구와 성찰 없이 가능하지 않다.” 구글 번역 시대에 곱씹어볼 소중한 번역론 16편을 묶었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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