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시인 백석의 그 유명한 시 ‘국수’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야트막한 산 밑에 터를 잡고 살아보니 눈이 많이 오면 정말로 산새들이 집 근처 들판으로 내려와 먹이를 찾느라 분주하다. 상수원 보호니 그린벨트니 해서 수십 년간 규제로 묶인 집 뒷산은 그 덕에 땅값은 아니 오르지만 자연값은 천정부지로 오르는 행운(?)을 내게 선사했다. 뒷산과 자연스레 연결돼 있는 집 후원은 그래서 새들의 천국이다.
새봄 되어 아침 공기가 부서질 듯 신선해지고 새잎이 푸르러질 때 새들은 가장 바빠진다. 알 낳아 품고 벌레 잡아 새끼 먹이느라 그런가보다. 이럴 때 뒷정원을 향해 난 침실 창문으로 들리는 새들 지저귐에 새벽잠을 깨는 호사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꾸기 싫은 나만의 사치다. 그러나 이 시절 새들은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다. 하늘 높이 날아오르기만 하지 내게로 다가오는 일은 드물다. 오히려 잎 지고 눈 내리는 한겨울의 절정에 새들은 내게로 나려와 내 책상머리 위에 걸려 있는 추사 김정희의 (歲寒圖)에 살포시 자리잡는다. 유배지 제주도 누거(陋居)가 좀 덜 추우리라.
새들도 겨울 되면 춥고 배고파 삶이 고단해진다. 추운 겨울 나려면 아무리 겨울맞이 새 솜털옷을 둘러도 추운 것은 추운 것. 이것을 이겨내려면 새들도 열량 풍부한 지방질이 필요하다.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How to attract, house, and feed birds)이라는, 1970년대 중반에 간행된 이 분야의 제법 널리 알려진 고전을 일독하다가 힌트를 얻었다. 퇴근길에 읍내 구시가지에 있는 ‘밀목정육점’에 들러 아내님(?) 지시 사항인 이것저것 몇 근에 큼지막한 쇠기름을 얻어온다. 새들 사정을 전해주면 인심 좋은 여사장님은 양 볼에 볼우물을 만드는 웃음으로 풍성한 새들 겨울 잔칫감을 기꺼이 선물한다.
하도 잘 먹어 비만이니 당뇨니 하며 인간들이 내팽개치는 육고기 기름을 부엌 앞 창가에 내놓으면 박새며, 참새며, 직박구리며, 그 밖에 이름 모를 겨울 철새들이 끊임없이 날아와 쉬지 않고 기름덩이를 쪼아댄다. 물론 새들 간에 우애는 없다. 덩치 크고 성질 더러운(?) 놈들이 포만하고 나면 그다음 순서로 활주로에 비행기 순서대로 내려앉듯이 내려앉아 제 몫을 쪼아대고 파르랑하고 사라진다. 평생 골프채 한 번 잡아본 적 없고 스키장 한 번 가본 적 없지만, 이곳으로 이사 온 이후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겨울날”도 심심한 것을 전혀 모르고 사는 비법 중 하나다.
앞서 책 내용에 따르자면, 새는 마실 것(물)과 먹을 것(음식)과 잘 곳(집)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도심지 정원에서 새들 ‘꼬일 때’ 이야기고 나의 경험에 따르자면 새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특히 겨울철에는) 먹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추위에 버틸 열량을 제공하는 기름기다. 정성이 뻗친 새 애호가들이라면 쇠기름이나 기타 동물성 기름을 녹여 여기에 새들이 좋아하는 각종 씨앗을 넣어 굳힌 특별 서비스 ‘기름+ 알곡’ 케이크를 만들어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나 같은 ‘귀차니스트’들은 그물망에 기름덩이를 넣어 걸어두는 것만으로도 상생의 의무를 다한다는 자부심에 스스로 흡족해하는 편이다.
새 집을 만들어 정원 이곳저곳에 설치해주면 기능적이기도 하거니와 운치도 있지만, 실제 새들이 더 좋아하는 집은 엎어놓은 긴 화분(물구멍을 통해 드나든다)이나 지붕 처마 밑에 달린 물받이 홈통이나 긴 풀숲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제 스스로 설치한 자연산 안식처다. 정 만들어주고 싶다면 ‘꼬일’ 새 종류에 맞춰 크기를 결정하되 제발 알록달록 총천연색 칠은 피하고 집 내부는 대패질하지 않고 거칠게 놓아두는 것이 상책이다.
이렇게 겨울을 지내다보면 어느새 노랑 꾀꼬리가 무리지어 날고 딱따구리가 목탁 소리를 내며 나무 쪼아 집을 만들고 이팝나무 흰 꽃이 필 즈음 소쩍새가 밤늦게 우는 계절이 다시 올 것이다.
강명구 아주대 사회과학대학 행정학과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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