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하여 ‘2013 병맛 어워즈’다. 기억해야 할 혹은 만듦새 좋은 콘텐츠들은 여러 매체에서 호명되고 기록되므로 우리는 굳이 간직하지 않아도 되는 것, 언젠가 ‘레어템’이 될 것을 불러보기로 한다. 눈치 보지 않고 시대를 너무 앞서나간 작품,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도대체 의미와 콘셉트를 찾을 수 없는 정체불명의 작품, 때로 보는 이로 하여금 화를 불러일으키는 작품까지 한자리에 불려나왔다. 위키피디아는 ‘병맛’을 “맥락이 없고 형편없으며 어이없음”을 뜻한다고 정의한다. 처음에는 주로 웹툰에서, 황당하지만 재미있다는 뜻으로 쓰였지만 의미가 확장되면서 여러 창작물 중 수준 이하라고 여겨지는 것들에도 적용됐다. 어쨌거나 완벽함과는 동떨어지지만 묘한 재미와 카타르시스를 주는, 장르의 관성을 무너뜨린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참으려 해도 자꾸만 콧방귀를 뀌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모아놓고 살펴보니 매끈한 작품들만큼이나 시대·사회적 맥락을 품고 있었다. 각 영역에서 활동하는 대중문화비평가를 중심으로 질문을 던졌다. 올 한 해 가장 골때리는 작품은 무엇이었습니까?
와 ,그러니까 이런 작품들이 불려질 줄 알았다. 등장인물 사망 예고제를 비롯해 작가의 독특한 세계관이 논란이 됐던 드라마 나 ‘막장’ 비판에도 40% 시청률을 눈앞에 둔 주말연속극 , 지난 7월 스리슬쩍 출간된 박근혜 대통령 화보집 나 김무성·조경태 의원 등 여야 의원 11명이 참여한 크리스마스캐럴 음반 같은 것들. 하지만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앞의 두 작품은 ‘충격과 공포’라는 한국 막장 드라마의 기본 공식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병맛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았다. 는 “책 깔끔하고 좋아요. 사진도 넘 예쁜 게 많아요ㅋㅋㅋㅋ 추천입니다!”라는 별 5개 평가부터 “이민 가고 싶다”는 별 1개 평가까지 양극을 오갔지만 질문받은 이들 사이에서는 “그런 것도 있었나요?”라며 외면을 받았다.
TV평론가 이승한씨는 해군으로 간 (MBC)와 추석 특집으로 방영된 3부작(SBS)을 꼽았다. 부정적 의미로서의 ‘병맛’이다. “소설가 이외수씨 강연 삭제 이후 나라를 지키는 이야기에서 북방한계선(NLL)을 지키는 이야기로 넘어갔다. 나라를 지키는 콘셉트는 그나마 공감할 수 있는데, 시종일관 자막이나 출연진들의 대화로 NLL을 반복해서 언급하니 불편해진다. 안 그래도 병영사회인 나라에, 주적이 북한이라 하더라도 군대에서 부조리한 부분들은 삭제한 채 긍정적인 부분만 강조해서 거의 국군 홍보 예능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편 지난 추석 방송 이후 ‘일진 논란’을 낳았던 에 대해서는 “가해 학생들에게 지나치게 포커싱해 과거 폭력 행위를 여과 없이 내보냈다. 가해 학생들의 잘못을 전 국민에게 폭로하고, 피해 학생들에게는 프로그램을 통해 다시 그 악몽을 떠올리게 해 2차 가해를 한 셈이다. 의도가 어쨌건 반성보다는 변명이 앞섰던 PD의 태도로 인해 논란이 가중됐다”고 평했다.
시나리오작가 김지현씨는 민음사에서 출간한 한국시인협회 시집 을 올해의 병맛 출판물로 꼽았다. ‘박정희 유신’과 ‘1987년 6월항쟁’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이제하씨의 소설 연재를 거부한 의 행태는 그에게 올해의 병맛 사건이다. 이승한 TV평론가와 마찬가지로 실망스런 의미에서다. “은 어떤 걸 금지시킨 것이고, 시인협회의 시집은 적극적으로 어떤 것을 한 것인데, 둘 다 결국 같은 의도다. 예술, 특히 문학은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하는데, 갈 데까지 갔구나 하는 느낌이었달까. 지켜야 할 것은 버리고, 싸워야 할 사람에게 아양을 떠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화도 났지만 되게 우스운 한편 무섭기도 했다. 왜냐면 시인협회나 민음사나 현대문학이나 다 이 바닥에서 메이저라고 할 수 있는 집단들이니까. 이 판에도 권력이 있고, 또 그 권력도 다른 권력에 충성하면서 지키고 싶은 이익이 있다는 게 슬펐다. 무엇보다 너무 노골적으로 의도가 드러나고 어떤 경우에는 작품성도 떨어지니까, 이런 걸 해도 왜 좀 멋있게 못하냐… 서글프기도 하고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그랬다.”
쾌감 불러일으키는 기묘한 감수성앞에 언급된 것들이 진지하게 외면하고 싶은 ‘병맛템’이라면, 검색 본능을 자극하는 콘텐츠도 있다. 이를테면 음악평론가 김학선씨가 꼽은 헤비메탈 밴드 ‘피해의식’의 싱글 음반 라든지, 펑크 걸스밴드 ‘피싱걸스’의 음반 처럼 많이 알려지지 않은 밴드의 노래들. 김학선씨는 “피해의식은 경력이 아주 짱짱한 헤비메탈 인디밴드다. 기타리스트도 ‘다크미러 오브 트래저디’라는 블랙메탈 밴드에서 기타를 쳤던, 해외에서도 꽤나 유명했던 밴드의 일원이었다. 는 의도적으로 쌍팔년도식 헤비메탈을 지향한 음반이다. 뭔가 아주 키치스러운데 음악은 탄탄하고, 복장이나 헤어스타일은 병맛이다. 뮤직비디오도 아주 진지하게 찍었는데, 보는 입장에서는 유치하고 웃긴다”고 말했다. 한편 피싱걸스의 음악은 특별하다기보다는 가사나 발상에서 기지가 돋보인다. 김학선씨는 “듣고 있으면 초등학생이 썼을 법한 노래 가사가 많다. 유치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점에서 병맛이라 할 수 있다”고 평했다. 그러니까 이런 가사다. “오빠 나 천오백원만 주세요. 소주 사먹게. 담뱃값도 얹어서 주시면 나 너무너무 좋아요.”() 의미도 감동도 찾을 수 없지만 한편으론 ‘의미?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하게 하는 노래들이다. 듣는 이에게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기묘한 감수성이 누가 알아봐주지 않아도 세상 한켠에서 신나게 울려퍼지고 있다.
무의미의 의미를 추구하려는 경향음악평론가 차우진씨는 올해 데뷔한 걸그룹 ‘퀸비즈’를 꼽았다. “타이틀곡 (Bad)의 뮤직비디오를 보면 뱀파이어 콘셉트인데, ‘약한 여자는 벗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센 여자’를 지향한다. 하지만 무엇을 추구하는지 분위기를 도통 파악할 수 없고 영상을 끝까지 보기 힘들다”고 평했다. 기존 걸그룹과 다르게 잔혹하고 선정적인 ‘19금’ 뮤직비디오는 차별성은 있지만 그렇다고 특별하진 않다. “밤 바라바 밤 바라바 밤 바라바 예에 난 나쁜 여자 이대로 놀래~/ 레이디스 술래 술래 강강 더 높이 방방/ 붐 샤카라카 붐/ 챠미나미나 예에” 같은 뜻을 알 수 없는 후렴구는 잘린 팔, 도끼, 피가 난무하는 살벌하게 진지한 뮤직비디오와 충돌하는 허무한 웃음을 유발한다.
[%%IMAGE2%%]병맛이 미덕인 장르도 있다. 문화평론가 김봉석씨는 웹툰 , 일본 만화 을 들었다. 은 거북이 형상의 가스파드와 뭘 해도 잘 안 되는 얼간이 신인류 캐릭터들이 펼치는 좌충우돌 이야기다. 동물 혹은 외계인을 닮은 듯한 캐릭터로 그려지지만 사실은 작가 가스파드와 친구들의 일상 에피소드를 그린 웹툰이다. 위트 있는 패러디와 누구나 겪는 일상 에피소드를 잘 버무려 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올 10월 시즌1을 종료하고, 책으로도 출간됐다. “이 꽤 인기도 좋았고 만화를 좋아하지 않는 독자들이 봐도 충분히 공감이 가는 만화였다면 은 마니악하다. 둘 다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멍청한 짓 하고 다니는, 이른바 잉여·찌질이들의 이야기인데 우리도 맨날 저지르는 그런 이야기들이다. 은 와 같은 (과장된 표정 묘사, 성적 코드 활용 등) 일본 특유의 개그 코드가 돋보이는 만화”라고 전했다.
영화평론가 황진미씨는 올해 큰 인기를 얻었던 영화 을 병맛 영화로 꼽는다. 은 아파트 초인종 낙서 괴담을 모티브로 제작한 스릴러 영화다. “빈민, 하우스푸어, 고급 아파트와 사멸해가는 철거 직전의 아파트의 대비… 이런 몇몇 장면만 보면 사회문제, 부동산 문제에 관한 인식을 가진 영화로 해석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 영화의 이데올로기는 중산층 가정에 진입한 자, 혹은 그로부터 떨어져나왔거나 그렇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중산층에 진입하기를 꿈꾸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꿈을 잃어버리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안정된 삶을 위협당할까봐 두려워하는 성수(손현주), 그리고 중산층의 삶을 욕망해 사람을 죽이고 그 사람 집에 가서 죽인 사람의 카드를 쓰면서 사는 여인 주희(문정희)까지 호러블하고 기괴하다. 하우스푸어의 집에 대한 욕망이 ‘미친 것’으로 묘사되고, 남자주인공이 가난한 형에게 죄책감을 갖고 있는데, 그것에 관해 ‘왜’가 설명되지 않는 영화다. 아마도 처음 설정은 그렇지 않았을 텐데 만들다보니 감독의 계급적 무의식이 반영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황진미씨가 비판한 이야기의 개연성은 500만 명 이상이 본 대중적 흥행을 했음에도 많은 관객이 지적한 문제이기도 하다.
언급된 작품들의 결을 살피면 이런저런 맥락이 읽힌다. 의미와 감동을 확보해야 한다는 강박, 한편으론 오히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무의미의 의미를 추구하려는 경향, 그리고 정권의 압박으로 상징되는 과거로의 회귀 같은 지루한 난제들이 있다. 하지만 고른 돌 사이에 모난 돌처럼 튀어나와 있는 이 병맛템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오랜 후에 이 시절을 촘촘하게 돌아보게 할 재료이기도 할 것이다.
병맛은 병맛으로 즐겨야지더 큰 의미 부여를 하거나 해석을 하는 것은 미뤄두기로 한다. ‘병맛의 조상’ 웹툰작가 이말년씨가 이런 말을 했으므로. “병맛은 병맛으로 즐겨야지 논리적으로 분석하려 하면 더욱 재미없어진다.” 괴이해서 생기 넘쳤던 콘텐츠들의 분투에 박수를 보내고 우리를 분개하게 했던 기괴한 콘텐츠나 사건들에 안녕을 고하며, 잘 있거라 2013 병맛템들이여.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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