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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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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원시림에 낸 둘레길

‘국어사전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등록 2013-12-14 14:12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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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이란 풍성한 우리말의 잔칫상이나 다름없다.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적절하게 대체된 말들은 흰 발의 종족처럼 말갛고 향기롭다. 말이란 쓸수록 풍성해지고 쓰지 않으면 곧 사라져버린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는’ 소수 언어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말도, 우리말 속의 어휘도 끊임없이 사라지고 있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지만 단어들은 사전에 가서 죽는다. 하지만 이 무덤은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곳이기도 하다. 국민의 언어 체육에 적극성을 불어넣어 한글의 섹시한 근육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으로, ‘국어사전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같은 책을 만들 수 있다. 이 책은 우리말 원시림에 둘레길을 내고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전략 상품이다. ‘국어사전 100배 즐기기’라고 할 수 있으며 ‘놀 게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논다’는 정신의 산물이다.

저자로 전국의 애마부인을 수소문해야 할 것이다. 사전이란 기호의 대륙을 가로질러 우리를 목적지에 실어나르는 말(馬)이기 때문에 준마를 거느린 오너들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신상 사전이 나올 때마다 사서 모으는 ‘사전 컬렉터’, 손때로 반질반질하게 닳아 시속 200km로 달릴 수 있는 사전의 주인, 영어사전 한 장을 뗄 때마다 씹어 먹었던 ‘염소의 추억’이 있는 사람, 말의 미로에 갇혀 말의 고문을 즐기는 사전 마조히스트 등등.

손에 들고 보는 사전과 온라인 사전의 차이는, 오프라인 서점에서 책을 사느냐 모바일 마켓에서 책을 사느냐의 차이와 비슷하다. 오프라인 서점에 가면 책을 많이 사게 된다. 유혹이 많기 때문이다.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에 가는 기분으로 사전을 펼쳐보자. 온갖 섹시한 단어들이 우리를 유혹한다. 동의어의 함정에 눈멀고 속담풀이에 귀먹는다. 낱말의 배열 순서는 우리말 자모의 디테일한 위계를 익히게 한다. 사전의 ‘일러두기’는 밤하늘의 북극성과도 같고, 사투리는 주전부리이고, 예문은 비상식량과도 같다.

말은 추상으로 초월하려는 본능이 있다. 반면 사전에서는 말의 물질성 내지는 육체성이 펼쳐진다. 말의 해부학 강의를 청강하는 기분이다. ‘깊다’라는 단어를 찾으면 다섯 가지 기본 뜻이 제시돼 있다. “겉에서 속까지의 거리가 멀다” “생각이 듬쑥하고 신중하다” “어둠이나 안개 따위가 자욱하고 빡빡하다” 등. 듬쑥하다? 모르면 이어서 찾으면 된다. 찾아보니 “분량이나 수효가 매우 넉넉하다”는 뜻이다. 예문으로 “백화점 식당에서 배를 채우고 어청어청 내려오던 면우는 포켓에 듬쑥한 돈의 용도로 넥타이 하나를 택했다”가 나온다. 예문의 출처는 유향림의 작품 ‘구구’(區區)다. 유향림을 찾아보니 평양의 근대 작가다. 그의 단편을 모은 선집이 국내에 나와 있다. 이처럼 사전 찾기는 종종 엄청난 지적 파급효과를 낸다.

단어의 뜻에 깊게 접속하고 말들의 식생과 폭넓게 산책하는 곳이 바로 사전이다. 히치하이커들이여! 사전에서 아무 말이나 잡아타고 말의 환유가 벌이는 황홀경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꾸나. 사전 읽기의 깨알 재미가 뇌리에서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득인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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