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올라 펼쳐진 풍경은 아주 시원하다. 인간의 마을은 그악스러움을 잃고 산맥이 열어준 틈에 고양이처럼 붙어서 잠들어 있다. 산에 오르면 땅의 주인이 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산맥이 꿈틀꿈틀 만나고 이어지는 한국 산악의 원시 풍경은 그 안에 어떤 스토리를 품고 있는 듯 여겨지기도 한다.
요즘 산책하면서 ‘산책’(山冊)을 구상하고 있다. 산악인들이 보는 실용서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나, 등산의 철학이나 에세이류도 욕심이 나지만 더 흥미로운 건 (山戰) 같은 책이다. 의인화된 산들이 자웅을 겨루는, 산들의 전쟁 팩션이다. 그러면 산지가 국토의 80%인 한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머리에 넣고 있어야 할 한국 산의 지도와 식생, 개별 산들의 특징을 쉽고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의 육체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물론 춘추전국시대나 삼국시대와 같은 익숙한 전쟁 이야기를 산맥관계도에 넣어 픽션으로 등뼈를 만들어야겠지만, 산에 관한 수많은 신화·전설·민담·일화를 잔뼈와 살로 붙이면 꽤 재미있으면서도 유익한 책이 되지 않을까?
큰 산에서 작은 산의 순서로 일단 ‘산’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담아내는 게 중요하다. 우리 동네 뒷산인 경기도 파주의 심학산(尋學山)도 고작 해발 194m에 그친다. 남들에겐 등성이로 보일지 몰라도 내겐 무엇보다 소중한 큰 산이다. 이런 맥락에서 작은 산들을 모두 포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산맥 하나당 인상적인 가계도를 작성하는 것이다. 가령 소백산맥이라고 할 때 구룡산, 주흘산, 속리산, 황학산, 대덕산, 백운산, 지리산, 백운산 등이 하나의 대가족을 이루는 모습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쉬운 작업은 아니리라. 에 나오는 무당파, 아미파, 곤륜파 등을 좀 활용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다음 하나의 산맥과 또 다른 산맥이 최고의 정상 자리를 다투는 산맥들의 춘추전국시대로 무대를 옮겨간다. 을 좀 참조해 태백·소백·차령·노령·광주산맥의 군단이 서로 합종연횡하고 군사들(개별 산들)을 데리고 진격한다든지, 별동대를 조직해 후방을 치고, 사절을 파견해 협상하는 등의 드라마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이 과정에서 ‘울산에서 올라온 바위가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끼지 못하고 설악에 주저앉았다는 전설’은 변형된 에피소드로 충분히 삽입될 만하다. 이외에도 사찰 전설과 지명 유래 사전 등을 활용한다.
나는 말고도 물고기들의 전쟁을 다룬 (魚戰), 풀들의 전쟁을 다룬 (草戰)도 나오면 좋을 것 같다. 에서는 토종 물고기의 다양한 식생을 다루면서 이들이 살고 있는 공간인 하천과 그 다양한 지류를 잘 결합시키고, 을 통해서는 종 보존을 위한 풀들의 소리 없는 전쟁을 있는 그대로만 다뤄도 좋을 것이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font color="#C21A1A">*‘존재하지 않는 책들의 도서관’은 ‘출판계의 아이디어뱅크’ 글항아리 대표 강성민씨가 갖고 싶은, 읽고 싶은 책에 대한 아름다운 몽상과 기획의 순간을 차곡차곡 쌓는 코너입니다.</font>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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