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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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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국물 활자의 술판

대폿집의 역사
등록 2014-06-25 15:09 수정 2020-05-03 04:27

언젠가부터 술 한잔 할 일이 생기면 중국집에서 시작해 일본식 선술집 이자카야로 건너가는 게 공식처럼 돼버렸다. 서울 연남동 중국집 ‘하하’(哈哈)의 군만두나, ‘향미’(鄕味) 류산슬 한 접시와 칭다오 맥주로 시작하는 저녁 술자리는 시장기를 무섭게 먹어치운다. 이자카야에선 주로 마구로낫토나 고노와다를 시키고 기린이나 아사히를 마신다. 그런데 가격이 만만치 않다. 이래서야 선술집이란 말이 무색해진다.
한창 빠져 있을 때인 지난해 가을 이자카야를 다룬 멋진 책을 하나 번역해보려고 시도했는데, 저자가 일본인으로 귀화한 영국인이었다. 일본어로 에세이를 써서 문학상을 받을 정도로 일본어와 문화에 정통한 한국의 박노자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이 작자가 갑자기 자신의 책을 해외로 내보내길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해외 밀반출도 아닌데 도대체 왜!
이자카야(居酒屋)를 번역하면 선술집, 대폿집이다. 서서 마시는 술집, 큰 잔에 한입 털어넣고 집으로 가는 술집이다. 한국에도 대폿집이 있다. 큰 잔에 막걸리를 따라 마시고 두부김치나 전류, 노가리를 씹는 것이다. 요즘 이자카야는 거리에서 눈만 돌리면 보이지만, 대폿집은 그리 잘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큰 고깃집이거나 횟집이고, 자그마한 노포들은 번화한 시내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마포 서서갈비 골목에 가면 예전 드럼통을 놓고 먹던 맛을 기대할 순 있지만 시끌벅적해 정신이 없을 지경이라 별로 내키지 않는다. 을지로의 골뱅이집들이 그나마 한국식으로 진화한 대폿집이 모여 있는 곳이리라. 이곳 풍경은 ‘파 송송 계란 탁’처럼 ‘파 쫙쫙 골뱅이 탁탁 노가리 찍찍’이다. 둘이나 셋이서 맥주 한잔 하기 딱 좋은 노가릿집이 있었는데 늘 노가리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지금도 여전한지 올여름에 한번 가봐야겠다.
각설하고, 한국 대폿집의 역사를 다룬 책을 한 권 내보고 싶다. 대폿집도 술과 안주의 조합이 다양하다. 국밥을 잘 말아주는 집이 있고, 남산동의 ‘도로메기 왕대포’처럼 꾸덕꾸덕한 도루묵을 환상으로 구워주는 곳도 있다. 파와 돼지고기를 은박지 위에 볶아서 초장에 찍어 먹는 연신내 술집들도 역사가 길다. 곰장어, 고등어, 오징어 등도 스페셜한 대포의 주제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대포의 역사에서 은막의 별들을 다시 불러와 추억의 국물을 내고 활자의 술판을 벌이는 일이 될 것이다.
아쉬운 것은 한국의 포장마차 문화가 사라졌다는 점, 선술집들이 점점 대형화하고 고깃집이나 횟집으로 천편일률이 된다는 점이다. 대폿집의 역사를 살피는 일은 이런 추세에 브레이크를 거는 심리가 깔려 있다. 그래서 발에 걸리는 이자카야처럼 눈만 돌리면 할머니가 욕지거리를 날리는 술맛 돋는 대폿집이 주렁주렁 열리는 밤거리가 되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을매나 좋을 것인가.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존재하지 않는 책들의 도서관’을 이번 회로 마칩니다. 필자인 강성민 대표는 몇 주 뒤 새로운 칼럼으로 돌아옵니다. 그간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과 수고해주신 필자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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