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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만 쓰면 뭐해, 번역을 하라

<번역은 글쓰기다>
등록 2014-05-17 14:13 수정 2020-05-03 04:27
한겨레 박미향

한겨레 박미향

글쓰기와 작가적 삶에 대한 책들이 최근 붐을 이루고 있다. 우리 사회의 글쓰기 열기가 새삼 놀랍다. 글을 잘 쓰고 싶은 욕구뿐만 아니라 글을 써야 먹고살 수 있는 세상이 왔다는 증거이리라.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도 글쓰기에 관한 번역서들을 준비 중이다. 그 과정에서 번역에 대한 독특한 생각이 떠올랐다. 번역이라는 행위가 하나의 글쓰기 훈련의 장이라는 것. 번역만큼 좋은 글쓰기 선생이 있을까? 아마 직접 창작하는 것 정도가 있을 것이다.

번역은 ‘베껴 쓰기’와 ‘옮겨 읽기’의 이중주다. 번역은 미지의 한 세계를 가장 높은 강도와 밀도로 추체험하는 행위다. 번역은 사유의 과정이다. 역자는 저자의 생각을 되씹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전개시킨다. 글쓰기가 생각 쓰기이듯 번역 또한 생각 옮겨 쓰기인 것이다.

좋은 책을 공들여 옮기는 일은 굉장한 지적 훈련이면서도 동시에 글쓰기 기술을 향상시키는 훈련이다. 다양한 좋은 문장을 사례별로 만나볼 수 있다. 주술 관계의 호응, 세련된 쉼표 찍기 등 글쓰기의 기본 기술을 체화시키는 건 물론이다. 좋은 문장은 아무리 만연체라도 주술 호응이 분명하다. 마치 동사에 개목걸이를 묶어놓은 것처럼 저 멀리서도 주어를 향해 반짝거린다. 나아가 복잡한 논리적 사유를 전개시키는 훈련도 된다. 특히 복잡한 것을 무조건 현학 취미라며 싫어하는 한국 특유의 잘못된 편견을 바로잡을 수도 있다. 문학적 표현에 이르면 번역만큼 냉혹한 훈련장도 없다. 라임이 있는 시를 한국어로 옮기려면 재주를 넘는 곰이 되어야 하니 말이다. 무엇보다 책을 쓰기로 작정한 사람이라면 향후 자신이 저술할 책의 롤모델을 지속적으로 교체·순환시키고 끊임없이 상향 조정해나감으로써 눈을 높일 수 있다. 눈만 높이는 게 아니라 실력도 같이 높이는 것이다.

중진급 저자들 중엔 자기 책 쓸 시간도 없는데 무슨 번역이냐고 하는 분이 많다. 나는 이런 태도를 신뢰하지 않는다. 일정한 수준에 이른 저술가일수록 자기 분야의 우수한 성과는 반드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그가 쓴 글들이 자기복제와 동어반복을 피할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기만적인 동어반복에 둘러싸여 있는가. 최근 우리 출판사의 책 세 권(다 합쳐 1500쪽)의 번역을 맡아주신 한 대학의 중진 교수님은 나에게 “번역만큼 공부가 많이 되는 일도 드물다”며 참 고맙고 귀한 말을 해주셨다. 나는 교수들의 업적 평가시 논문이나 저술보다 번역에 1순위로 비중을 뒀더라면 우리의 학문 수준이 매우 높아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 결과에 대한 엄정한 후속 평가가 뒤따라야 하겠지만 말이다.

번역이 ‘옮기는 행위’일 뿐만이 아니라 ‘번역은 글쓰기다’라는 인식 전환을 품고 번역의 각 단계를 글쓰기 기술과 연결시킨 트랜스 북을 한 수 시전해보고 싶다. 제목은 혹은 정도가 될 것이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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