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4년에는 책의 운명이 어떻게 변할까? 그때까지 책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말이다. 문득 이것이 몹시 궁금해진 나는 이란 소설을 한번 구상해봤다. 1964년 가난한 국문학도 김활자는 시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2164년의 서울에 불시착한다. 그녀의 가방엔 그해 초판이 나온 정비석의 (女人百景)과 김동리의 소설집 가 들어 있었다. 200년이란 시간의 블랙홀을 빠져나온 그녀를 맞아준 이는 2164년의 북헌터 정동리다. 과거에서 시간여행을 온 여인의 가방에 무척 귀한 고문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정동리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모든 공상과학소설(SF)이 그렇듯 약간의 전사(前史)가 필요하다. 인류는 2050년에 완벽한 전자책 시대를 구가한다. 아마존과 구글을 합병한 삼성전자가 자유자재로 휘어지는 플렉서블 전자책 시대를 열었다. 모든 종이책은 연료로 재생되거나 폐기 처분되었다. 그런데 2080년 지속적인 전자책 읽기가 인간의 몸에 독성 바이러스를 합성시켜 치명적인 눈의 질환을 불러온다는 사실이 여기저기서 보고되면서 일대 사회 혼란이 일어난다. 교육시장이 마비되고 출판사들이 망하고 소송이 잇따랐다. 그러자 궁지에 몰린 전자책 개발업체는 십수 년간 연구를 거듭해 획기적인 기술 개발에 성공한다. 바로 ‘형상기억잉크’였다. 기존 전자책은 전자(electron)가 발광다이오드 상태로 정보를 발산하는 형식이었다면, 이 형상기억잉크는 전원에 연결되지 않고도 ‘책’을 계속 재현해내는 일종의 무한반복 인쇄술이었다. 예전의 종이책과 무게감이나 질감이 거의 유사한 특수합성고무로 만든 인공책에 형상기억잉크를 주입해두고, 독자가 돈을 내고 구입한 ‘책 프로그램’을 실행시키면 잉크가 소설 한 권 분량의 스토리로 질서정연하게 배치되는 기술이다. 이를 두고 ‘전자’라는 것을 버리자 ‘리더기’에서 다시 ‘책’으로의 혁명이 일어난 것이라고 한 언론은 평가했다. 이때가 2150년에 접어들었을 무렵이다.
그런데 형상기억잉크는 반드시 옛날 활판인쇄술로 찍어낸 책들의 활자에서 추출해낸 잉크를 원재료로 해야만 했다. 오랜 시간 종이에 깊숙하게 박혀 글자 형태로 고정된 잉크만이 형상기억잉크로 프로그래밍될 수 있었다(미래의 연금술이란 참으로 감탄스럽기 그지없다). 문제는 연구소 쪽이 확보하고 있는 활판인쇄 고서들로는 영문 자모만 완벽히 커버할 수 있을 뿐 한글 자모는 90% 정도밖에 구현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 자모들을 포함하고 있는 과거 책들의 목록이 데이터베이스화돼 있었고, 거기엔 과거에서 온 김활자의 가방에 든 두 권의 고서도 포함돼 있었다. 전문 북헌터들이 현상금이 걸린 한글 활판인쇄본 책을 찾아 혈안이 되어 돌아다녔다.
김활자에게 상황을 설명한 정동리는 그녀를 자신의 오토헬기에 태우고 100km 떨어진 연구소로 방향을 잡았다. 금세 추격자들이 따라붙고 이들을 따돌리기 위해 복층 고속도로의 1층부터 17층까지를 오락가락하며 두 남녀는 질주하기 시작했다. SF 작가님들 이거 왕창 다듬고 연애와 철학 넣어서 어찌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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