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악함을 악함으로 만드는 악한 기획

‘악서열전’ (惡書列傳)
등록 2014-01-25 16:01 수정 2020-05-03 04:27
한겨레 자료

한겨레 자료

몇 년 전 히틀러(사진)의 이 독일에서 재출간된다는 소식을 나에게 전해주면서 이것 한번 해보라고 권한 지인이 있었다. 당시 나는 확 짜증이 일어 “아니, 그런 쓰레기 같은 책을 내가 왜 내냐”고 벌컥 화를 낸 적이 있다. 지금 돌아보니 내 생각이 짧았던 것 같다. 히틀러의 책을 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해 책을 많이 팔 수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깊게 들여다보려면 ‘악’(惡)이라는 것을 전면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막상 악이라고 하면 무엇을 악이라 규정해야 할지부터 막막해진다. 사이코패스는 생물학적 배경이, 각종 강력범죄는 유년의 트라우마가 후렴구처럼 따라붙기 때문에 과연 그들을 악한이라 규정짓기가 망설여지는 것이다. 홉스의 ‘만인의 투쟁’이나 한스 모겐소의 ‘국가 간의 정치’가 주창한 냉혈의 법칙을 떠올려봐도 인간의 온갖 악행은 그 본성에 적나라하게 각인된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요소임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 사회 고위층의 역겨운 행동들을 보다가 든 생각은, 왜 우리는 ‘악함을 악함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보지 않는 것일까’였다. 인간의 정념(情念)이라는 것,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파토스(Pathos)라 부르는 이것은 목표를 향해 강하게 충돌하려는 성질이다. 악함은 이 정념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강하다는 게 내 느낌이다. 그 정념이 너무 강하거나, 좌절했거나, 변질됐거나 하는 것을 우리는 히틀러 자서전류의 책에서 민감하게 알아챌 수 있다는 그런 생각.

그래서 나는 그 주인의 악행이나 사악한 생각으로 인해 역사적 단죄를 받고 이미 오명(汚名)이 되어버린 책들을 골라서 하나의 계열을 이루려는 욕심을 갖고 있다. 이른바 ‘악서열전’(惡書列傳)이다. 발터 베냐민과 동시대의 인물로 독일 사상가이자 작가인 에른스트 윙거(1895~1998)가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것이다. “새로운 인간이란 나약하고 타락한 부르주아와는 다른 전적으로 새로운 인종으로, 폭력과 파괴를 겁내지 않는 일종의 세련된 맹수”라고 주창한 그는 등의 책을 썼는데, 이 일련의 책들로 그는 “파시즘의 역사철학”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이런 윙거를 베냐민의 비판 글과 함께 책으로 묶어낸다면 ‘악서열전’의 얼굴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으리라 본다. 악서가 많지는 않을 것이다. 우생학이나 과학적 기계론에 따라 사회와 인간을 개조하려는 부류의 책들이 좀 떠오르긴 한다. 순수한 악서라기보다는 인간이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책, 이것 또한 어느 정도는 악서이고 악서의 운명은 이런 사후적 효과에 좌우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우리가 ‘악서열전’에 포함시키는 순간 그 책은 어쨌든 악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위험하고도 권력스러운 기획이라니.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