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츠바이크의 를 완독했다. 5일간 꽤 많은 시간을 투자했는데, 책을 잡아도 서문만 읽고 그만두는 요즘의 나로서는 이 대단한 여자의 무모한 생애에 비할 데 없는 흡인력을 느낀 것이다. 멋진 드라마였다. 세계 최초로 단두대에 머릴 들이밀었던 여왕 메리 스튜어트. 도끼날이 세 번이나 희번덕이고 나서야 이 말 많은 여왕은 세상과 영원히 분리되었다. 츠바이크의 두터운 묘사는 책 읽는 내내 앞에 실린 몇 장의 흑백 화보를 들춰보게 만들었다. 16세기 왕가 내부의 갈등과 암투는 등장인물들의 ‘상판대기’를 계속 확인해보고 싶게 만들었고 결국 나는 구글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화려하게 잘 차려입고 반질반질하고 얼굴에 홍조를 띤 우아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왕가의 사람들은 사실은 등에 칼을 꽂는 배신의 짐승들이었다. 메리의 얼굴은 불타올랐던 삶에 비해 고요하고 차가웠다. 유리처럼 잘생겼지만 유리처럼 약해 깨져버리고 만 메리의 둘째 남편 헨리 단리, 메리의 목에 드리울 죽음의 올가미를 최초로 마련해준 셋째 남편 보스웰 백작 등.
장광설을 늘어놓는 텍스트에 둘러싸여 말 없는 이 인물들을 문득 독특한 형식의 책에 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메리 스튜어트의 삶을 실제 그림의 연대기로 연출해보면 어떨까. 컬러 도판을 왕창 때려넣는 것에는 나도 반대다. 그러면 저자가 힘들게 구축해놓은 정념의 그물망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후 9개월의 메리가 대관식을 치른 스털링성의 저 외롭고 높고 암울한 풍경은 너무 멋지지 않은가. 캔버스에 칠해진 물감이 모자이크처럼 조각조각 난 이 오래된 초상화와 궁정생활화·전쟁화를 확대해보면, 그 균열을 통해 시대와 접속하는 새로운 교감의 즙이 흘러나오지 않겠는가.
책에서 그림은 양념이다. 혼자만으로는 서지 못해 글에 기대고 박스를 만들어줘야 그 안에 존재의 집을 짓는다. 글과 그림을 함께 풍성하게 하긴 쉽지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림을 선택하려면 글을 버려야 한다. 만화나 그래픽노블도 아닌데 그림만으로 연결과 흐름을 이루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새롭게 그리는 것도 아니고 한정된 역사화만으로 흐름을 만들어내야 하는 형국이니. 백과사전식 정보 전달의 책도 아니다. 그림과 대화를 나누는 그림책, 그림 뒤에 100년의 역사를 숨겨놓는 히스토리북인 것이다.
다행히 우리에겐 츠바이크라는 조력자가 있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그림들을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감이 온다. 캡션으로 발췌하면 시적인 해설이 되어 그림들을 이어붙이는 훌륭한 접착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그림독서는 무엇을 얻을 것인가. 천천히 넘기며 인간의 역사에 젖는, 결국 손에 잡을 수 없는 한없이 컬러에 가까운 흑백일 것이다. 물론 츠바이크는 무덤에서 나의 이런 행위에 저주를 퍼부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할까? 일단 새롭게 손에 잡은 츠바이크의 를 읽으면서 좀더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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