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낭만파 시인 퍼시 셸리가 격정적으로 써 내려간 ‘서풍부’(西風賦, Ode to the West Wind)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 바로 그 유명한 “겨울이 오면 봄이 멀 수 있으랴”이다. 전원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의 월동 준비는 겨울을 대비하는 마음에 더하여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해야만 한다. 앞선 두 회의 겨울맞이 칼럼이 먹을 것과 1∼2월 따습게 지내기에 관한 것이라면, 이번 칼럼은 3∼4월을 즐겁게 맞기 위한 준비 과정 정도로 읽으시면 되겠다. 이 마을 고참 전문 농사‘꾼’들은 셸리를 전혀 몰라도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고는 벌써 정월 대보름이면 오곡밥 든든하게 먹고 윷놀이 한판 논 다음 봄농사를 준비한다. 그때쯤이면 이미 은은한 ‘고향의 냄새’가 온 동네에 퍼질 것이다. 낭만적 도시인들 코를 틀어쥐게 만드는 돼지똥거름 냄새 말이다.
스산한 초겨울에 ‘만물이 소생하는’ 가슴 저미도록 아름다운 봄을 생각하며 해야 할 일은 아무래도 텃밭 정리와 정원 손질이 우선이다. 많은 경우 가을걷이를 하고 나면 ‘나 몰라라’ 하기 쉬운데, 이건 우리 가족을 1년간 잘 먹여주고 또한 눈을 즐겁게 해준 텃밭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잡초 방지용 검은 비닐 ‘쪼가리’들이 한겨울 바람에 울부짖는 좀비처럼 펄럭이는 텃밭을 보면 한세상 뜻있게 살다 간 생명을 예의 없이 저세상으로 배웅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못하다. 잘 갈무리된 겨울 텃밭에 서리가 내리면 봄·여름과는 색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할 뿐 아니라 ‘좋은 삶’을 살다가 온화하고 평화로운 미소로 이승을 향하는 자의 숭고함이 연상된다.
겨울 텃밭 갈무리의 기본은 무엇보다 수확한 농산물들의 뒷정리다. 고구마 줄기며 배춧잎이며 콩단이며 깻단 등은 가지런하게 덮어주거나 태워 정리한다. 또한 맨땅이 드러나지 않도록 낙엽이나 볏짚 혹은 왕겨 등 가용한 모든 자연물을 이용해 덮어준다. 그래야 땅도 좀 따습게 겨울잠을 자고 봄이면 활기차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날 것이다. 이즈음까지 푸른 잎으로 버티는 녀석들은 다년초이기 십상이니 미리미리 제거해주면 내년에 힘이 덜 든다.
만약 당신이 나와 달리 ‘귀차니즘’의 유혹에서 벗어나 좀더 부지런한 사람이라면 어느 서양 잡지에서 읽은 비장의 겨울맞이 텃밭 준비 노하우를 귀띔한다. 밭이랑을 30∼40cm 정도 깊이로 파고 여기에 생닭똥을 두툼하니 깔고 흙으로 덮어놓으면 닭똥이 겨우내 발효하며 땅도 데워주고 봄이면 알맞게 발효해서 토마토며 오이며 열매채소를 기르기에 최고란다.
텃밭뿐 아니라 정원도 겨울 준비가 만만치 않다. 정원 겨울맞이 중 가장 어렵고 중요한 부분은 역시 가지치기다. 이 고을의 ‘가위손’이며 내 정원 선생님이자 일 친구인 손준섭이 몇 마디 툭툭 던진 말을 주워듣고 이리저리 책을 뒤져본 풍월에 따르자면, 가지치기는 정원일의 백미로서 식물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할 뿐 아니라 열매와 꽃을 풍성하게 만드는 정원 일의 엘도라도다. 금상첨화는 경험이 쌓이면 힘이 달리는 노년에 더욱 완숙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전지가 끝나면 추위에 약한 놈들은 잘 싸매주고 뿌리를 캐서 보관하거나 옮길 녀석들에게 걸맞은 대우를 해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 봄이면 들판 가득 퍼질 수선화를 상상하며 몇 년을 키워 몇 배로 불린 수선화 구근을 옮기기에 바쁜 아내를 멀찍이서 바라보면 밀레의 명화 (晩鐘)이 따로 없다. 물론 자연에 대한 경건함과 더불어 봄을 기다리는 환희가 보태져서 말이다.
이처럼 맞는 초겨울은 자못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겨울이 오면 봄이 멀 수 있으랴” 하고 외치는 셸리를 뛰어넘어 ‘그 봄이 가고 나면 겨울은 다시 온다’는 자연의 섭리를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요즘 들어 자못 거창하게 전세계적으로 떠드는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것이 뭐 별거더냐. 순환의 논리를 깨닫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더냐. 너나 나나 태어나고 죽는다는 말이다. 죽은 다음 새 생명이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살아가야 제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아내의 지청구로 마친다. “당신 분수도 모르고 오늘 주제넘게 너무 잘난 체하는 것 같다.” 죄송합니다.
강명구 아주대 사회과학대학 행정학과 교수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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