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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지배체제와 공생하는 진보

비판마저도 규율하는 삼성에 대해 우리가 내면화하고 있는 여러 신화들
사람 매거진 <나·들> 12월호
등록 2013-12-06 17:18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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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에는 노조가 몇 개나 될까?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은 이들조차 ‘0’이라고 답할 가능성이 크다. 신화는 사실을 압도한다. ‘무노조 경영’은 삼성의 신화다. 노조가 실재해도 그것을 인지하기 어렵게 한다. 사실에 입각한 답은 ‘9’다. 그러나 이 가운데 7개는 회사의 음덕을 누리고 있으니, 사실을 넘어선 진실의 정답은 ‘2’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삼성지회(에버랜드)와 민주노총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삼성그룹에 ‘벌써’ 그리고 ‘무려’ 2개의 노조가 있다는 사실은 각별하다. 2011년 삼성지회는 무노조 삼성의 성채에 첫 균열을 내고 깃발을 꽂았다. 올해 설립한 삼성전자서비스지회는 조합원 수가 1천 명을 넘는다.

학벌주의에 따른 비자발적 선택

삼성그룹에서 노조활동을 하는 이들은 무엇을 바라고 하는 걸까? 이 질문은 삼성의 봉건적인 노무관리가 얼마나 영악하고 잔혹한지 알고 있는 이들일수록 품기 쉽다. 그리고 이 질문은 다시 이렇게 번역된다. 잠자코 삼성이 시키는 일만 착실히 하면 평생 편히 먹고살 수 있었을 이들이 무슨 ‘명분’을 위해 굳이 골리앗에 맞서는 걸까? 그러나 이 또한 사실을 은폐하는 신화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들은 말한다. “배고파서 더는 못 살겠으니까,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죽을 판이니까. 가정이 파괴되고 이혼당한 사람이 수두룩하다. 싸우지 않으면 죽을 판이다. 죽더라도 한 번은 싸워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사람 매거진 12월호 ‘나들의 초상- 삼성 왕국, 신민에서 시민으로’는 삼성에 관해 우리가 내면화하고 있는 여러 신화들을 들춘다. 사실 삼성 신화에 대한 비판은 적잖이 있어왔다. 그러나 은 이 신화들이 삼성에 대해 비판적인 이들의 인식까지도 얼마나 무섭게 규율하고 있는지 따진다. 삼성 안에도 치열하게 노동운동을 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삼성은 노동자들이 먹고사는 데 어려움이 없을 만큼 임금·복지를 제공한다고 쉽게 믿어버리는 것도 삼성 신화를 내면화한 탓이라는 것이다. 대학생들이 삼성을 직장으로 선호하는 이유가 학벌주의에 따른 비자발적 선택이라는 사실도 보여준다.

이 제기하는 마지막 물음은 ‘삼성은 과연 천년왕국인가’이다. ‘반삼성운동’을 펼쳐온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를 만나 한국의 엘리트 진보 진영의 지적 게으름이 삼성 지배체제와 적대적으로 공생해온 이면을 살핀다. 또 삼성의 일극 지배체제가 어떻게 삼성의 몰락과 한국 사회 전체의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그 파국에 대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탐문한다. 김상봉은 한국 진보 진영이 속물성과 지적 환상의 공모에 안주하고 있다고 일갈하며 “우리 모두 실재에 천착하는 리얼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노동자 경영권’이 삼성 지배체제와 자본주의를 극복할 유력한 대안이라고 강조한다.

“못이면 망치의 세례를 받아라”

이 밖에 은 ‘3차원 인터뷰’에서 일반 대중보다 아이돌 가수들이 더 선망하고 흠모하는 가수이자 작곡가, 프로듀서인 라디(Ra.D)의 삶과 음악 세계를 소개하고, 왜 대중음악계 주류가 이 비주류를 그토록 사랑하는지를 20여 쪽에 걸쳐 살핀다. 이 패기에 차면서도 진지한 뮤지션의 이야기에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성공학을 넘어서는 그만의 성공 철학, 기획사와 인디로 이분화된 한국 대중음악의 미래 전망이 담겨 있다. 라디는 말한다. “재능보다는 개성이다. 못으로 태어났으면 튀어나와 망치의 세례를 받아라. 그러고 나서 세계와 소통하고 공유하라.”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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