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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야 할 그 사람을 만나는 공포

‘(준) 안면인식장애’
등록 2013-11-23 15:32 수정 2020-05-03 04:27
한겨레 송호균

한겨레 송호균

초딩 동창 간 ‘썸씽’을 가능케 해주던 인터넷 커뮤니티 ‘아이러브스쿨’에 들락거리던 때가 있었다. 어느 날, 서울 지역 ㅅ초등학교 3학년 같은 반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같은 대학에 다니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급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얼굴을 아무리 보고 또 봐도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만나놓고 ‘나 너 몰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1시간 넘게 ‘너만 기억하는’ 개구리 해부 추억담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몇 달 뒤, 캠퍼스에서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던 낯선 남자를 지나쳤다. 알고 보니 그 친구였다. 주야장천 알아보지 못해 미안해.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 한번 본 사람을 매의 눈으로 기억해, 출신학교·인맥을 줄줄이 꿰는 ‘내본기’(내추럴 본 기자)는 남의 말이다. 전날 점심을 함께 먹어놓고, 하루 뒤 장례식장에서 만난 출입처 최고경영자(CEO)를 알아보지 못했다. 먼저 알아보고 달려가 인사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수습 시절 ‘뻗치기’의 공포는 두 배였다. 뻗치기란, (주로 안 좋은 일과 연관된) 취재원을 만나기 위해 집이나 직장 근처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이다. 인간적으로 묻기 어려운 질문을 해야 하거나, 냉대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뻗치기 중 두려운 것은 정말 그 사람과 맞닥뜨리는 일이다. 내 경우엔, 만났으나 누군지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다는 공포가 얹어졌다. 그나마 스마트폰 등장 이후 이러한 두려움은 많이 사라졌지만.

스마트폰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2005년 겨울, 황우석 사태로 세상이 시끄러웠다. 그해 12월16일 배아줄기세포에 대한 데이터 조작 의혹을 폭로한 노성일 미즈메디병원 이사장(사진)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서울 관악구에서 ‘밤샘’ 뻗치기를 하다 잠시 눈을 붙이던 그날 아침, 선배 기자의 호출을 받고 기자회견 장소인 서울 강서구의 병원으로 달려갔다. 눈곱도 떼지 못한 채였다. 선배는 병원 길목에서 노 이사장을 기다리라고 했다. 과연 그를 알아볼 수 있을까. 병원 앞에 수상한 기운이 돌았다. 사복 경찰로 보이는 남자들이 누군가를 에워쌌다. 무리를 향해 돌진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노 이사장님!” 남자가 돌아봤다. 맞다는 신호다. 유레카! “기자이신가?” 그가 입을 열었다. 사흘간 못 씻어 기자 같지 않아 이런 말을 하나. “네.” 그러곤 말문이 막혔다. 얼굴 인지에 급급해 질문거리 생각은 뒷전이었다. ‘지금 심경이 어떠냐’는 질문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기자회견장에서 합시다.” 단 한마디를 남기고 뒤돌아선 그 앞으로 수많은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황망해하며 발걸음을 옮기자, 다른 언론사 선배가 내게 달려왔다. 노 이사장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느냐는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답했다.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지 말고 괜찮으니 이야기를 해보란다. 수습도 창피한 건 안다.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느 연예인들이 앓고 있다는 ‘안면인식장애’와 달리 계속 보고 오래 보는 얼굴들은 까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스마트폰에 저장된 연락처는 1600여 개. 이 가운데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은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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