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긋지긋한 도시를 어떡해야 할까. 누구는 틈만 나면 서울 탈출을 궁리하고 누구는 차마 애정을 버리지 못해 서울 구석구석을 유람한다. 격월간으로 버스 노선 하나를 정해 이야기를 만드는 독립잡지 <thinking bus->를 만드는 이혜림(22)·이예연(22)씨는 이 도시에 “애증이 있다”. 너무 거대하고 빨리 변화하며 옛것을 쉽게 지워버리는 서울에서 때로 벗어나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므로 “좀더 좋아지고 계속 머물고 싶길” 바라는 마음으로 도시 곳곳을 탐사한다. 1년 동안 여러 대의 버스를 타고 내리며 베테랑 버스 여행자가 된 이들의 도움을 얻어 서울시내 버스 여행을 계획했다. 경복궁 앞에서 출발해 강남을 지나는 402번과 잠실을 지나 서울 종로구 혜화동로터리에서 회차하는 301번을 탔다.
402번 타고 하얏트 지나 신사역으로
서울에서는 총 7512대의 버스가 360개의 노선을 따라 움직인다(서울시, 2013년 6월 기준). 정류소 개수는 6038개. 여기에 더해 219개 노선, 1428대의 마을버스가 운행하고 있고 최근에는 심야 시간대 전화 통화량 빅데이터를 분석해 9개 노선을 설계한 심야 전용 ‘올빼미버스’가 추가됐다. 선택지가 많다. 의 저자 이경훈 국민대 건축학부 교수는 “서울 마을버스는 워낙 수도 많고 잘 조직되어 있어서 계속해서 갈아타면 서울에서 대전까지 거리인 150km도 갈 수 있다”고 썼다. 점점 방대해지는 계획을 다잡고 9월25일 오전 11시 서울 사대문 가운데에 섰다. 경복궁 앞 세종문화회관 버스정류장에는 여러 갈래로 퍼지는 버스들이 선다. 103번 버스는 종로를 지나 미아리 방향을 향한다. 150번은 여의도를 지나 시흥으로 간다. 이 정류장을 지나는 400번대 버스들은 서울의 남쪽을 향하고, 700번대 버스들은 서울의 북서쪽을 향해 달려간다. 옛 도성 앞에 서서 강남을 향하는 402번 버스에 올라탔다. 402번은 세종문화회관 정류장에서 총 48개 정류장, 28.3km를 달려 장지공영차고지 정류장에 도착한다.
버스는 시청을 지나 서울역 버스환승센터에서 승객을 대거 싣고 남산을 향했다. 숭례문남산방향 정류장에서 내리면 남대문의 뒤통수가 보인다. 불에 타 오랜 시간 개비한 남대문의 얼굴이 쓰리게 말갛다. 총총, 시장으로 접어든다. 추석 대목이 지나 붐비지 않으리라는 짐작은 오산이다. 시장은 시장이다. 한 할머니가 무화과 한 더미를 내놓고 노점에 앉았다. 무더운 여름 달게 익었을 과일이 탐스럽다.
한 때 새로웠지만 이젠 낡고 뒤떨어진
한참을 걸어 다시 신사역 버스정류장에 당도했다. 강남역·양재·도곡을 지났다. 경쟁하듯 하늘을 향하는 아파트촌을 지나 대치동 미도아파트 정류장에 닿으면 오래된 아파트촌이 나온다. 은마와 미성 아파트 단지가 마주 서 있다. 먼 미래의 역사서에는 이 지역을 두고 ‘논밭이 금밭 될 뻔했던 현장’이라고 기록할지 모른다. 다큐멘터리영화 (2011)의 강유가람 감독은 이곳을 두고 모래성처럼 부스러져 없어질 수도 있는 재개발 환상을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므로 사람 냄새가 난다. 눈에 띄고 싶어 안달하는 간판들이 조밀하게 붙은 은마 상가 지하로 들면 재래시장을 방불케 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떡집, 생선가게, 털실가게, 쌀가게, 옷수선집, 반지 세공 가게, 소파 천갈이하는 곳까지, 몇 시간 전 지나온 남대문시장을 압축해놓은 듯하다. 국을 포장해 파는 가게에서는 커다란 솥에 육개장이 푹푹 끓는다. 칼국숫집과 분식집에 사람이 넘친다. 끈적한 기름때가 낀 메뉴판을 보니 2천원짜리부터 시작해 4천원을 잘 넘지 않는다.
버스는 다시 달린다. 대치동과 개포동을 지나는 길에 펼쳐진 아파트촌과 낡은 상가들, 키 작은 주공아파트 단지는 1980~90년대 도시가 팽창하던 때를 목격한 이들에게 익숙한 풍경이다. 한때는 새로웠던 그 공간이 이제는 낡고 뒤떨어져감을 차창 밖으로 목도한다. 종점을 몇 정거장 앞두고 가든파이브 공구상가 정류장에 내렸다. 상가는 듣던 대로 텅 비어 있었다.
베어링 판매상 오아무개씨는 청계천에서 15년간 장사하다 3년 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했다. 오씨는 “잘될 거라는 비전을 보고 왔는데 이렇게 상가에 활기가 돌지 않으니 불안하다. 앞으로 행여 용도 변경이라도 해버리면 어디로 가야 할지 잠이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스산한 상가를 뒤로하고 나오니 어느덧 날이 서늘해졌다.
장지공영차고지 정류장에서 나는 마지막 승객이었다. 해가 저물어 주변이 빠른 속도로 어두워진다. 여행자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하지만 늘 계획보다 한 템포씩 늦는 게 여행이라 생각하며 다음 버스를 기다린다. 돌아가는 길은 혜화동으로 향하는 301번을 탔다. 잠실을 지나 탄천을 건너 동호대교를 타고 한강을 넘는다. 검은 강이 흐르는 밤의 서울은 아름답다. 모든 게 어둠 속에 녹아들고 반짝이는 것들만 남았다.
장충동 동국대입구 정류장과 광희동 정류장 사이에는 오래된 족발집이 촘촘하다. 어디가 맛집이라더라? 가물거리는 기억을 헤매는 사이 버스는 다음 정류장에 당도했다. 광희동에 내려 김수근이 설계한 경동교회를 한 바퀴 돌고 올까 하다가 마음을 접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정류장에 내리니 불야성의 동대문시장이 펼쳐진다. 남대문이 낮의 시장이라면 동대문은 밤의 시장이다. 쿵쿵, 거리에 음악 소리가 높다. 옛 동대문운동장 뒤편 도매시장 도로가에 커다란 옷가방들이 충북 청주, 부산, 전북 전주… 행선지에 따라 줄지어 서 있다.
집 앞 버스정류장의 아무 버스나 타고
밤 9시, 마지막으로 당도한 곳은 301번의 회차 정류장인 혜화동로터리. 정류장 근처에 ‘15개에 5천원’이라는 종이를 써붙인 사과 노점이 있다. 노점상이 사과 하나를 깎아 저녁 식사를 대신한다. 번잡한 대학로를 등지고 성북동 방향으로 걷는다. 슈퍼마켓 2층, 옷가게 사이에 소극장들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10층 정도로 보이는 낮은 아파트 입구에 ‘명륜동 주상복합 아파트’라고 쓰여 있다. 과연 아래층에 몇몇 상가가 불을 밝히고 있다. 잠실에서 미끈하게 빠진 주상복합 아파트들만 올려보다가 소박한 아파트를 만나니 반갑다. 더 걸으면 1930년대 지어졌다는 장면 전 총리 가옥이 나온다. 다시 대학로로 발을 돌려 50년을 훌쩍 넘긴 오래된 카페 학림다방에서 마지막 여정을 썼다. 다방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크림치즈케이크를 시켰다. 토끼 문양이 새겨진 케이크는 푸딩 같기도 양갱 같기도 하다. 오렌지잼을 발라 맥주와 함께 푹푹 퍼먹었다.
다시 혜화역 마로니에공원 정류장에 서서 미아리고개를 넘어 무량사 입구에 당도하는 104번, 정릉을 향하는 143번 따위를 타고 북진을 궁리하다 밤이 깊어 멈추었다.
시내버스 여행은 게으른 여행자에게 맞춤이다. 집 앞 버스정류장의 아무 버스나 타고 출발할 수 있다. 촘촘히 계획을 짜지 않아도 좋다. 버스 노선이 이미 촘촘하므로 길 잃을 염려가 없다. 목적지를 향하다가 마음이 바뀌어서 혹은 흔들흔들 유람하는 버스에 앉아 깜박 잠이 들어 내리지 않아도 그만이다. 예정에 없던 길을 달리면서 우리는 여행객의 시선으로 창밖을 바라본다. 평소 스마트폰에 고개를 박고 있느라 놓쳤던 조각들이다. 오래됐거나 바뀌었거나 혹은 느리거나 빠르거나, 같고도 다른 여러 결의 도시를 만나게 되리라.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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