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을걷이가 한창인 시골 마당은 곡물과 열매를 말리는 일로 발 딛고 다닐 틈이 없을 정도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우리 민족은 집 안에 그 흔한 정원조차 만들지 않고 빈 공간인 ‘마당’을 만들었을까. 그간 나는 운 좋게도 세계의 여러 나라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고, 수년간은 외국 생활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런데 외국 생활이 깊어질수록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산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의 음식이었다. 한국 음식이 세계인의 입맛에도 어느덧 익숙해지고 더러는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것도 단순한 드라마의 유행 때문만은 아닌 듯싶다.
언젠가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요리사님들의 저녁 식사 자리에 우연히 합석을 했다. 그때 나는 외국 생활의 기억을 떠올리며 우리나라엔 유난히 '제철음식'이라는 개념이 강하고 종류가 다양한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때 우리나라 최고의 김치요리 전문가라는 분도, 한식요리 전문가라는 분도 한결같이 이런 대답을 했다. “우리 농산물은 유난히 맛있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같은 종을 기르는데도 우리나라에서 길러야 맛이 나거든요.” 결국 우리 땅에서 나는 우리 농산물, 그 재료에 답이 있다는 말이었다. 우리 농산물은 왜 유난히 맛이 좋을까? 이걸 식물의 입장에서 따져보면 식물을 키우는 환경인 흙과 날씨가 곡물을 키우기에 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엄밀히 따져보면 봄의 가뭄과 황사, 여름의 장미와 무더위, 가을의 태풍, 겨울의 극한의 추위. 날씨 자체가 분명 식물을 키우기에 적합한 나라는 아니다. 그런데 곡물과 과일이 유난히 맛이 좋은 건 아이러니하지만 극한의 날씨를 견디면서 식물이 본능적으로 자손을 번창시키기 위해 열매를 맺는 일에 더 많은 힘을 썼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된다. 결국 열악한 환경을 이기기 위해 식물이 더 알찬 열매를 맺었다는 역설이 나오는 셈이다.
생각해보면 올여름 얼마나 덥던지, 땡볕에 한두 시간 서 있기라도 하면 구토 증세가 올라올 정도로 힘이 들었다. 남도지방에는 비도 적어 가뭄으로 식물이 타들어갈 지경이었다. 그런데 어느덧 이제 들판엔 누런 벼가 알알이 선명해지고 있고, 과실수마다 과일이 주렁주렁하다. 햇곡식·햇과일이 나오는 가을 추수를 기념하는 추석 명절이 수천 년을 이어온다. 우리끼리 축제를 벌이자는 것이 아니고 혹독한 시간을 잘 견디고 열매를 맺어준 식물에 대한 감사의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렇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잘 살아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오경아 작가·가든디자이너 *‘정원의 속삭임’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좋은 글을 써주신 필자와 애독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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