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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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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이 우리에게 천천히 가자 한다

영국 스타워헤드가 주는 교훈
등록 2013-06-15 09:05 수정 2020-05-03 04:27

영국의 스타워헤드 정원을 걷는다. 500년 역사의 정원은 돌화분에 얹힌 이끼가 말해주듯 깊게 묵었다. 1714년, 은행업을 통해 신흥 부 유층으로 자리잡은 헨리 호어는 런던 인근 시골에 땅을 마련했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이곳에서 태어난 그의 아들인 같은 이름의 헨리는 스무 살에 거대한 저택과 정원을 유산으로 받은 뒤, 어머니의 뜻에 따라 정원을 가꾸 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자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 이 꿈꾸던 마치 풍경화를 연상시키는 정원을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1741년에 시작한 정원 디자인과 시공이 그가 죽기 다섯 해 전인 1780 년까지 이어졌으니 무려 39년이 걸린 셈이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정원은 아들대로 이어졌고, 다시 1783년 아들에서 손자인 리처드 콜 트 호어에게 물려졌다. 리처드는 할아버지 헨리가 39년간 만들어놓 은 정원에 마치 화룡점정의 점을 찍듯이 영화 의 무대 배경이 됐던 아폴로 템플을 비롯한 보트하우스 등의 수려한 건축물 을 추가했고,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식물에 대한 관심을 활짝 피 워 희귀한 나무들로 정원을 완성했다. 결국 이 정원의 완성은 1714년 땅을 구입한 이후 4대에 이르는 시간, 무려 124년이 걸린 셈이다. 그 리고 가문의 마지막 거주자였던 에드워드 호어가 선대로부터 물려받 은 유산을 고스란히 영국의 환경과 유물 보전단체인 내셔널트러스 트에 1949년에 기증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남겨지게 됐다.

임종기 제공

임종기 제공

영국 최고의 정원을 꼽으라면 늘 세 손가락 안에 호명되는 정원, 스 타워헤드의 탄생 이야기다. 며칠 전 나는 한국에서 정원박람회 관련 자문회의에 참석했다. 자문위원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정원박람회 사후의 유지와 재활용 방안을 제안해주는 자리였다. 지금 당장 어떻 게 했으면 좋겠느냐, 수익이 창출될 수 있는 묘수가 뭐겠느냐는 토 론의 자리에서 지금 당장의 수익보다 준비하며 기다리는 시간을 가 지면 안 되겠느냐고 맘 급해하는 당사자들을 어이없게 만들었다. 나 역시 이런 소리를 해야 하는 게 답답하지만 그래도 답은 여기에 있 다는 것을 안다.

그간 수많은 정원을 찾아다니며, 또 유럽의 정원문화를 눈으로 확인 하며 내가 배운 교훈은 천천히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원은 빨리 빨리 무엇인가를 완성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폭발적인 인기를 일으 켜 일확천금을 쏟아낼 수 있는 장소는 더더욱 아니다. 정원의 탄생 부터 그런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기에 정원은 늘 급한 마음을 붙잡으라 하고, 오늘 세운 계획은 내일 한 번 더 들여다보라고 가르 치고, 이번에 한 실수를 내년엔 다시 잘 잡아보라고 말해준다. 그렇 게 차곡차곡 세월의 힘이 위대한 정원을 만들고, 그 정원 속에서 사 람들의 문화가 자리를 잡는다. 회의가 끝나고 돌아서는 길, 한 관계 자의 한마디가 나를 아프게 찔렀다. “참 감명 깊은 말이었습니다. 그 래도 어쩌겠습니까? 이상과 현실이 많이 다르지요.” 그의 말이 맞다. 그런데 이 말이 맞다고 누구도 현실적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면 유럽의 그들이 이뤄낸 그 문화는 우리에겐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오경아 작가·가든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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