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역을 출발할 때는 비가 왔다. 기차는 남도 여수를 향해 달린다. 대 전을 지나자 땡볕이다. 알고 보면 우리나라가 참 크다. 장맛비 속에 서 있는 나무나 땡볕 속의 나무나 힘들어 보이긴 마찬가지다.
여름은 식물에게도 고통의 시간이다. 날씨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극 성스러운 병충해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식물이 맥없이 당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벌레가 나뭇가지를 뒤덮고 바이러 스가 침투하면 식물들은 치유제·고통완화제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과 학적으로는 살리실산메틸(methyl salicylate)이라고 부르는데, 이 치유제 를 이용해 인간이 만든 의약품이 우리가 잘 아는 아스피린이기도 하다. 그런데 살리실산메틸은 나무에 의해 다시 기화성이 강한 살리실산으로 변화돼 공중으로 날아간다. 비유를 하자면 이건 마치 ‘봉화’ 시스템이라 고 할 수 있다. 위험이 생겼을 때 수십km 떨어진 곳에서 불을 피워 다음 번 마을에 위급 상황을 알려 대비할 시간을 주듯이 병든 나무가 뿜어내 는 가스가 옆 나무에 전달되면 바로 알아차린다. ‘큰일 났다. 옆집이 병 충해 공격을 받고 있다!’ 그러면 옆 나무들은 재빠르게 병충해의 접근을 막을 수 있는 독성 물질인 페놀수지와 타닌산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을 통해 식물들은 전멸이라는 치명적 위험을 빠져나간다. 같은 나무지만 일부 가지만 죽을 뿐 본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도, 같은 수종이지만 한 나무만 죽고 이웃해 있는 나무가 살아남는 것도 바로 이 식물들끼리의 신비한 소통 때문인 셈이다. 물론 병든 나무가 치유제를 만들어내는 게 옆 나무를 위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덕분에 옆 나무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음은 명백하다.
들여다볼수록 식물의 삶이 참 신비롭다. 그런데 식물보다 수천 배는 더 복잡한 구조를 지닌 우리야 말해 무엇할까? 우리는 모른 채 혹은 억지 로 생각하지 않은 채 살고 있지만 이름도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노력으로 지금의 삶이 이뤄지고 있다. 그 누군가가 우리보다 먼저 살다 간 선배들 이고, 지금 우리 옆에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악연이라고 두 번 다시 얼굴 보고 싶지 않아 하는 지금의 누구도 실은 이다음 생각하 면 ‘아, 그래서 이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었구나’ 필연의 고리였다고 깨 닫게 될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 역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누군가의 삶 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일지 모르니 조금은 우리 삶을 고맙게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오경아 작가·가든디자이너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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