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2일, 뭐했는지 기억나?”
먼 훗날이 지나고는 아니고, 5월의 마지막 날 저녁을 먹다가 물었다. 뒹굴뒹굴하다 토요일 새벽에 잠들어 들국화 노래처럼 도 아니고 ‘저녁만 일요일’을 보낸 지 어언 몇 달. 그날이 그날인 일요일, 뭘 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익명을 요구한 시민 S가 대뜸 답했다. “기억 안 나는데요.” 시민 J가 잘라 말했다. “텃밭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지.” “어, 그걸 어떻게 기억하지?” “일요일마다 그러거든.” 남들이 말하는 사이에 스마트폰 일정표를 뒤적이던 시민 K는 “뭐했는지 안 나오네”라고 목소리를 깔았다. 그날의 일정표가 하얗게 비어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회사로 돌아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K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 그날 8시간 중노동을 했네.” “뭘 했는데?” “언니네 식당에서 메뉴판 만들었지.” “어떻게 알아?” “휴대전화 문자 보고 알았지.” 문자메시지도 기록이 되는 시대, 기록이 ‘갑’이다.
‘당신의 5월12일을 보관해드립니다.’ 이렇게 솔깃한 문구로 명지대 디지털아카이빙연구소는 장삼이사의 5월12일 일기를 모았다. 경향각지 남녀노소 200명이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홈페이지(archives.ac.kr/diary)에 일기를 올렸다. 여기에 단체로 섭외한 유치원생·초등학생·고등학생 400명의 일기가 더해졌다. 영국 서식스대학에서 해마다 해온 5월12일 기록의 채집에 올해는 명지대가 함께한 것이다. 온라인을 통해 모인 200명의 일기 중에서 ‘공개’를 선택한 이들의 일기를 읽었다. 일단, 나에게 없었던 아침에 일어난 ‘얼리버드’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당신의 5월12일을 보관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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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부터 여중생은 게임을 하고, 여고생은 머리를 펴고, 여대생은 조깅을 하려다 못했다. 이렇게 자녀들이 하루를 시작하는 사이, 엄마들의 고단한 하루도 시작됐다. 46살 엄마는 “직장인 여성”인데도 “6시30분”에 일어나 “비타민C 1봉지, 키토산 3알, 클로렐라 5알을 물 한 컵과 함께 복용”하고 “압력밥솥에 아침밥 5인분을 안쳤다”고 썼다. 게다가 “과음한 남편을 위해 콩나물국을 끊였다”. 아기를 둔 엄마의 일기는 새벽 1시30분에 시작된다. “01:30 아이가 울기 시작함. 달래도 더 크게 울고, 안아주면 뿌리치며 움.” 이렇게 일찍 일어난 이들은 하루를 어떻게 보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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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가수 장윤정만 ‘행사’를 뛰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종친회에 가는 어린이가 있고, 삼촌은 조카의 돌잔치로 바쁘다. 조카를 조카 이상의 딸로 여기는 삼촌의 일기는 ‘저출산 시대’의 가족 관계를 반영하기도 한다. 그 삼촌은 “돌잡이를 할 때 긴장을 하며 지켜봤는데, 역시나 조카가 현금을 잡았다. 대성할 인물이라고 생각했다”고 썼다. 행사가 없어도 학생들은 바쁘다. ‘모닝 조깅’에 실패한 여대생은 영어 에세이 시험을 보느라 “헐레벌떡 시험장으로 향했다”. 일요일 공부를 하러 학교에 가려다 버스를 놓치고 “부리나케 뛰어갔지만, 아아 내 버스님은 갔습니다”라고 쓴 고등학생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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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보니 사람들은 아침저녁으로 을 보고 있었다. 강원도에서 여고생이 을 보는 동안 “수능 180일을 앞둔” 고등학생도 “이 끝나고, (엄마와) 함께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매직으로 머리를 펴던 여고생, 새벽에 콩나물국을 끓인 엄마는 아침에 재방송을 봤다. 영화로는 한창 흥행 중인 이야기가 많았다. 아기를 어르고 달래는 과정에서 ‘노출된’ 아기들의 엔터테인먼트도 있었다. “내 핸드폰에서 유튜브를 검색한 후 ‘웃웃우마우마’ 동영상을 틀어 애한테 들려줌. 아이는 한 손으론 핸드폰을 들고 한 손은 내 손을 잡고 걷기 시작.” 새벽 1시30분, 우는 아이 달래기로 하루를 열었던 엄마의 오후 일기다. 같은 날, 서울에 사는 8살 남자아이는 “4D로 ‘달똥달똥달똥빵’ 만화도 보고 운동도 했다. 그 영화를 보고 나도 달똥빵을 먹고 싶었다”고 썼다. 일기는 ‘국민스포츠’로 등극한 야구의 위상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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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의 영웅은 류현진, 악당은 윤창중. 류현진이 메이저리그 4승째를 거두자 모두가 웃었고,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이 성추행 해명 기자회견을 하자 모두들 짜증을 냈다. 밤에 인터넷을 켠 고등학생은 “윤창중씨 관련 기사들이 가득하다. 어휴, 국격이 수직 상승하는 소리가 들리네”라고 썼다. 반면 류현진은 국민 ‘롤모델’이 되고 있다. 이렇게 일기에는 뉴스도 녹아 있다. “뇌종양 수술을 받고 정확히 1년이 지났다”고 일기를 시작한 27살 여성은 “오늘 걷기대회에 참가할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었다는 사실이 아주 행복하다”고 썼다. 그가 참가한 행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 4주기 추모 걷기대회였다. 하루치 일기에도 생로병사, 희로애락은 깨알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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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의 꿈을 포기하고 회계사 시험 준비를 하는 23살 여성은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남들이 눈·귀 다 막고 하나만 생각하느라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다 느끼고 이 시기를 지나가고 싶다”고 희망을 다졌다. 대학보다는 인생을 선택한 19살 여성은 “남들과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은 묘하게 들뜨면서 두렵다”고 일기를 마쳤다. 공익근무요원 신분으로 저녁에 PC방 아르바이트를 하는 22살 청년은 “힘들다. 먹고살기 힘들다”고 푸념하지만, “내 시간을 쪼개 조금조금 벌어서 사고 싶은 것도 살 수 있고, 부모님께 부담을 안 드릴 수 있기 때문에 좋다”고 썼다. 이날도 이렇게 청춘의 실망과 희망은 교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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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외국에서 만나는 한국인, 글로벌 시대가 가져온 일상의 변화도 일기에 담겼다. 외국 유학을 고려 중인 23살 한국 여성이 “다른 나라로 간다고 해도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다”고 하는 반면, 그의 대학 친구인 필리핀 사람 마크는 고국으로 “돌아갈 계획이 없다”. 한편, 해외 선교를 나간 것으로 보이는 26살 여성은 멀리서도 한국 문화와 단절돼 있지 않다. 그는 “앱을 켜 소설책을 읽어나갔다. 김중혁 작가의 . 잠깐이라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필력에 감탄하고…”라고 썼다.
음성 일기, 카톡 활용한 대화형 일기도세상이 바뀌니 일기도 바뀌었다. 글에 사진을 넣은 일기는 물론 음성을 녹음한 일기도 있었다. 카톡에 채팅방을 만들고 한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시간대별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어 만든, 대화 형식의 일기도 있었다. 해마다 쌓인 일기는 성·연령 등 형태별로 분류돼 ‘주제별 아카이브’를 만들 수도 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을 살짝 비틀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사회적인 것’이 된다. 일기를 통한 일상사 연구는 그런 것이다. 지난 5월29일, 전남 강진에 사는 76살 김오동 노인은 37년 동안 써온 일기장을 국가기록원에 기증 신청했다. 이렇게 인식이 바뀌고 있다. 개인의 기록이 모이면 우리의 역사가 된다. 덧붙이면, ‘모닝 조깅’에 실패한 여성의 일기는 이렇게 끝난다.
“집에 와서 주절주절 해림이랑 이야기하고 해림이가 치킨을 시켰다. 다이어트해야 하는데 내일은 꼭 모닝 조깅을 할 수 있길 기대해보며 이만 치킨 먹으러 가야겠다^.^”
그들도 우리처럼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것을 위안 삼아 살고 있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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