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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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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가 낳은 강력한 판타지

등록 2013-03-16 14:14 수정 2020-05-03 04:27
자파리필름 제공

자파리필름 제공

이것은 제주가 낳은 강력한 판타지다. 3만 명의 죽음, 그들의 원혼을 등에 업고 신기가 넘치는 영화다. 존재하지 않는 곳을 만들어냄으로써 피투성이 역사에서 반쯤 고개를 돌린 영화 과는 다르다. 은 65년 전의 가장 비극적인 공간으로 관객을 데려가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판타지를 건진다.

희망 없는 섬사람들의 피란길

뭍것들이 무슨 수로 1만8천여 신을 낳았던 섬의 기운을 헤아린단 말인가. 영화는 안개 같기도, 연기 같기도, 누군가의 입김 같기도 한 그저 아스라한 화면으로 시작한다. 그 기운 사이로 무딘 칼을 썩썩 가는 소리와 가마솥에 물이 펄펄 끓는 소리가 들린다. 축제일지도, 살육제일지도 모를 시간이 시작된다.

1948년 10월7일 “제주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지점은 토벌 대상으로 삼겠다”는 포고령이 발동됐다.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선거에 대해 반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어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도에서만 과반수 미달로 선거가 연기됐던 참이다. 미군정은 “도민의 70%가 좌익”이라며 제주를 정권의 정통성에 도전하는 섬으로 여겼다. “중산간 마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폭도로 여기겠다”는 9연대장의 말은 이렇게 나올 수 있었다. 중산간 주민들을 모두 해안지대로 보낸 뒤 한라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무장대들이 숨을 수 없도록 마을 전체를 불태워버리겠다는 계획이었다. 11월 중순부터는 과연 대토벌 작전이 시작되었다. 영화는 토벌이 시작될 무렵 동굴로 피신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섬사람들의 피란길에는 희망이 없다. 뭍으로도 하늘로도 갈 데가 없다. 그 뒤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상황은 절박하고 마음은 다급한데 피란을 떠난 사람들은 한가롭기 그지없다. 엉뚱한 곳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면서도 이 길이 맞다고 우기는 경준이나,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호통을 치는 용필 아저씨나 답답하기는 매한가지다. 어머니는 무릎이 아프다며 집에 남기를 고집하고 순덕이는 책을 가져오겠다며 사라진다. 순덕이 어멍(어멈)과 아벙(아범)은 마을 사람들과 나눠먹을 삶은 감자를 챙기느라 정작 딸은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지 못한다. 돼지 밥 굶는 게 더 걱정인 원식이 삼촌은 틈만 나면 몰래 집에 다녀올 궁리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비효율적인 피란 집단이라도 이 공동체를 떠서는 안 된다. 한데서 함께 잠을 자고 비좁은 동굴에서 날을 지새우던 사람들이 자리를 뜨는 순간, 인디언 인형처럼 하나씩 사라질 운명에 처한다.

반대로 가까스로 동굴로 돌아온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온 죽음을 절대 말하지 않는다. 짝사랑하던 처녀의 마지막을 본 총각은 그 부모 앞에서 말을 아낀다. 어머니를 업어오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갔다가 감자만 들고 온 아들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눈물을 흘린다. 아무도 피란처 안으로 절망과 죽음을 데려오지 않는다.

동굴 밖에 죽음이 기다리는 절망의 피란길에서도 사람들은 감자를 나눠 먹으며 남의 안부를 걱정하고 그 시절을 챙긴다. 영화 <지슬>은 사람의 목숨보다 더 질긴 제주 공동체의 이야기를 퍼뜨린다. 자파리필름 제공

동굴 밖에 죽음이 기다리는 절망의 피란길에서도 사람들은 감자를 나눠 먹으며 남의 안부를 걱정하고 그 시절을 챙긴다. 영화 <지슬>은 사람의 목숨보다 더 질긴 제주 공동체의 이야기를 퍼뜨린다. 자파리필름 제공

“고발 아닌 치유와 위로 위한 영화”

알려진 대로 ‘지슬’은 감자를 뜻하는 제주말이다. 가난의 음식이고 피란의 음식이지만, 굶주린 사람들이 언 땅을 파헤치노라면 가끔 마주치는 희망의 음식이다. 영화에서 어머니가 살을 바쳐 마지막 남은 온기로 데워내는 젖줄 같은 생명의 음식이기도 하다. 캄캄한 동굴에서 작은 화톳불을 피워놓고 몇 안 되는 감자를 나눠먹는 사람들은 일상적인 걱정거리를 주고받으며 이 고비를 넘기면 그저 앞으로도 무던히 살아지리라고 믿는다. 그 덕분일까. 관객이 희망을 놓기란 쉽지 않다. 어디론가 떠난 사람들은 은근히 살아 있을 것만 같다. 혼자 동굴에 남은 무동 아내가 낳은 둘째 아기는 또 어떻게든 구조될 것만 같다.

마지막 자막이 일러주듯 실제 역사는 이랬다. 토벌이 시작되자 제주 서부 중산간 마을 큰넓궤 동굴에 숨어들었던 120명의 사람들은 거의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사로잡힌 사람들도 정방폭포 아래로 쓸려가버렸다. 오멸 감독은 “현실에서는 군인들이 아기를 돌에 메쳐 죽였다. 그러나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일일이 들추고 고발하고 선동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치유하고 위로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무엇으로 위로할까. 진압 당시 의심스러운 자를 잡으면 군인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 죽이도록 했다고 한다. 4·3 관련 보고서에는 여자를 잡으면 마을 부녀자들에게 한 번씩 찌르도록 강요했던 사례까지 나온다. 그들이 죽이려 한 것은 좌익만이 아니라 제주의 질긴 공동체 문화였던 셈이다. 그전부터도 수탈과 분할통치의 역사, 우익청년단과 무장대의 대립으로 이미 제주에는 피해의식과 분열이 깊이 새겨진 참이었다. 그러나 영화 속 공동체는 희망의 판타지를 새로 짠다. 6명이 굳이 하나둘 엉덩이를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꽉 찬 구덩이는 엄폐물도 뭣도 아니지만, 다친 군인이라도 사람이면 누구나 그 안으로 끌어넣고 본다.

제사 형식을 빌린 4개의 시퀀스

영화의 분위기는 영화를 만든 사람들과도 무관치 않다. 이 영화를 만든 제작사 자파리필름은 2002년 제주의 문화예술 활동가들이 모여 시작됐다. 그래봤자 자파리필름의 본체인 자파리연구소의 멤버는 고작 5명. ‘자파리’는 ‘쓸데없는 짓’을 이르는 제주말이지만 생산성이 높다. 해마다 연극과 거리공연을 벌여온데다 이 네 번째 영화다. 처럼 전작 등도 제주의 문화와 습속을 담아 제주말로 만들었다. 이런 창작이 가능한 것은 속 공동체를 닮은 예술공동체 덕이다. 고혁준 프로듀서가 전하는 말에 따르면, 에서 무동이 아내 역을 맡은 최은미(31)씨는 자원봉사자로 발을 들였다가 배우가 됐다. 만철 역을 맡은 성민철(33)씨는 조감독이지만 배우가 없을 땐 연기도 한다. 강지윤(27)씨도 연출부지만 여자 주검 역할을 했다. 자파리연구소 소속 배우 장정인(40)씨의 딸은 생이 역할을 맡았다. 딱히 누가 할 일인지 가릴 수 없는 게, 알고 보면 영화처럼 친한 아저씨면 아무나 다 삼촌이라 부르는 혈연과 이웃의 경계가 없는 공동체에 살기 때문이다. 귓것(‘바보 같은 녀석’이라는 뜻의 제주말)들은 점점 사라져가는 말로 잊혀진 역사를 불러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다. 관광상품쯤으로 쉽게 소비됐던 제주 이야기를 대신할 말이다.

영화는 ‘신위’(영혼을 부른다), ‘신묘’(영혼이 머무는 곳), ‘음복’(영혼이 남긴 음식을 나눠먹는다), ‘소지’(신위를 태우며 드리는 염원)의 제사 형식을 빌린 4개 시퀀스로 전개된다. 제의를 넘나드는 카메라는 그들이 두고 온 사람들과 마을이 불타고 있을 때도 사람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감자를 나누고 있었다고 전한다. 어쩌면 이 일은 판타지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제주 자체가 한반도의 강력한 판타지였을지 모른다.

제주의 역사 드러내는 공연들
관리 아니면 유배자의 땅
<살짜기 옵서예>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살짜기 옵서예>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육지 양반 껍데기를 벗겨볼까.” 제주 사람들 기세가 드높다. 서울 예술의전당 안에 있는 CJ토월극장에서는 제주말과 제주 풍경이 가득한 뮤지컬 가 날마다 무대에 오르고 있다. 이 작품은 원래 1966년 초연됐던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뮤지컬이다. 초연 당시엔 가수 패티김이 여주인공인 기생 애랑 역을 맡았다. 그동안 한국 뮤지컬은 몰라보게 대형화됐다. 극이 시작되면 제주 깊은 바닷속 물결 모양으로 너울거리는 대형 스크린 사이로 해녀들이 등장한다. 스크린과 화려한 장식들이 수없이 바뀌며 제주의 너른 들판, 수포동 폭포 깊은 골짜기를 형상화한다. 무대 한구석 대형 돌할아방은 입체 매핑 기술을 써서 슬며시 미소짓거나 눈알을 굴리도록 했다.
연출을 맡은 김민정 감독은 “예전 뮤지컬에서는 제주말을 쓰기도 하고 안 쓰기도 했더라. 제주도 토박이 선생님을 모셔와 대본 작업부터 다시 했다. 모든 명사를 제주말로 쓰지는 못했지만 관객이 알아들을 수 있는 한에서는 제주말로 했다. 제주말이 낯설지만 더 특별하고 즐거운 느낌을 준다”고 했다.
뮤지컬의 원작은 판소리 이다. 제주목사로 부임하는 김경을 따라온 배비장은 부인이 죽자 주색을 가까이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러나 부임하는 관리를 녹여 이빨까지 뽑아버리는 제주 기생 애랑을 당할 재간이 없다. 결국 방자가 시키는 대로 개가죽 옷을 입고 애랑의 집을 찾아갔다가 큰 망신을 당한다는 이야기다. 은 제주 사람들의 처지에 대한 역설이며 희망으로 자아낸 노래다. 중앙정부는 쉽게 포탈·착취하고 이곳에 오는 관리들은 백성에 대한 학대와 농락을 일삼았다. 토색질에 넋이 빠진 제주 목
사들의 악덕도 수없었다. 그런데 기생 애랑이 배비장을 골탕 먹일 뿐 아니라 배비장을 따르는 방자도 여기에 합세해 말 한 필을 얻어낸다. 아마 옛 제주 사람들은 제주에 파견된 관리에게 개가죽 옷을 입히고 개구멍에 들여보내고 궤짝에 가두는 꿈을 꾸며 이 노래를 들었을 것이다. 현대 뮤지컬은 여기에 배비장과 애랑의 사랑 이야기라는 알록달록 고운 옷을 입혔다.
제주를 찾아온 외부 사람은 둘 중 하나였다. 관리 아니면 유배자. 제주대 스토리텔링연구센터와 제주MBC는 3월22일 제주도로 유배 온 광해군의 이야기를 담은 를 무대에 올린다. 광해군은 제주까지 유배 온 유일한 임금으로, 제주에서 생을 마쳤다. 양진건 센터장은 “예를 들면 중문관광단지는 제주가 아니다. 제주도를 관광지로 개발하며 제주도 사람들 대부분은 소외돼왔다. 서울 중심의 사고에 너무 익숙하고 이야기도 중앙중심적으로 편집된다. 유배지, 반란의 땅이던 제주의 역사와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는 공연 뒤 광해에 대한 평가와 해석을 달리하는 두 역사학자가 참여하는 토크콘서트도 연다.
제주의 과거와 현재를 가로지르며 기록으로 남기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3월21일부터 열리는 ‘인디다큐페스티발 2013’에는 제주를 기록한 다큐멘터리가 여럿 뽑혔다. 는 해녀 할머니의 씩씩한 삶을 담았다. 도 특별 상영된다. 올해의 신작인 과 은 강정마을의 기원을 담은 작품이다. 과거의 상처가 4·3이었다면 강정은 제주가 지금 끌어안고 있는 화두다.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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