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에렉투스의 후손들은 요즘 걷기를 배운다. 한 걷기협회가 추산해보니 그동안 전국에서 과정을 마친 걷기 지도자만 2만 명이 넘는다. 오래전 엄마 손을 뿌리치고 혼자서 두 다리의 무게중심을 바꿔가며 앞으로 나가는 법을 배웠던 어른들이 새삼 등을 펴고, 다리를 뻗는 법을 새로 익힌다. 지난 2월14일 찾아간 서울 서교동에 있는 한 연습장에서도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걷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이곳은 물리치료학을 전공하고 오랫동안 재활치료사로 일해온 안광욱씨가 운영하는 걷기 교육원이다.
수강생들은 어른 걸음으로 다섯 걸음이면 족할 좁은 강당을 반복해서 오가며 걷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단 한 걸음이 문제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서다 말고 자세가 무너지기도 한다. 그들의 걷는 모습이 독특했다.
는 책을 쓴 안광욱씨가 말하는 걷는 법의 요지는 ‘삼단보행’이다. 걸을 때 발뒤꿈치-발바닥-발가락 순서대로 발이 땅에 닿아야 한다. 얼핏 기본 상식처럼 들린다. 그런데 발뒤꿈치가 땅에 닿을 때 마주 보는 사람에게 신발 바닥이 보일 만큼 발 앞부분을 뒤로 젖혀야 한단다. 서로 엇갈리는 양쪽 발은 나란히 11자 모양이어야 한다. 팔자걸음에 익숙해진 우리나라 사람들은 안짱걸음을 걷는다는 생각이 들 만큼 무릎을 서로 스친다. 그날 모인 사람들은 한 달 넘게 이곳에서 교육을 받아왔지만 가끔 비틀거렸다. 오랫동안 동행해온 팔자걸음을 떼버리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걸음 폭이 넓었다. 안씨는 “나이가 젊을수록, 몸이 건강할수록 보폭이 넓어진다”며 “다리를 곧게 펴고 처진 골반을 바로잡으려면 일단 걸음부터 넓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이가 들수록 보폭도 좁지만 다리도 굽어 있기 쉽다. 다리를 곧게 펴고 걷는 데만 몇 달이 걸리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렇게 넓게 걷다가 고관절에 통증이 오면 바로 보폭을 줄여야 한다. 통증이 생기지 않는 범위에서 천천히 넓혀가는 것이 모든 운동의 핵심이다.
걷기가 이토록 힘들었을까. 걷기 시작한 지 5분쯤 지났을까. 수강생들의 얼굴에 땀이 흐르고 숨이 가빠졌다. 걸을 때 뒤쪽 다리의 무릎을 쭉 펴면서 앞쪽 발의 뒤꿈치가 땅에 스치듯 닿도록 한다. 팔은 뒤로 갈 땐 쭉 뻗고 앞으로 올 때는 구부리는데, 팔을 흔드는 폭도 보통 걸음보다는 훨씬 넓었다. 사람은 걸을 때 다리뿐 아니라 팔의 힘으로도 걷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걷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이력을 알 수 있다”는 안씨에게 걷기는 사유도 산책도 아니다. 그의 인생은 걷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다. “가정환경 때문에 어릴 때부터 마음의 짐이 무거웠다. 걸을 때조차 항상 생각에 잠겨 있었다. 생각하며 걸으면 걸음이 느려지고, 보행 속도가 늦어지면 중심잡기가 어렵다. 그렇게 걸었던 나는 이미 20대 후반부터 건강이 위기 상황으로 치달았다. 일본에서 재활치료사가 되려고 연수를 받으면서도 내 심신이 고달팠다.” 그의 말이다. 팔을 흔들지 않고 걷는 사람들은 대개 오십견 같은 어깨 문제가 있고, 수그리고 걷는 사람들은 가슴이 답답하거나 잠을 이루지 못한단다. 다시 걷겠다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심각한 건강 문제부터 우울증이나 불면증 같은 정신적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한다. “제대로 걷기는 사람을 변하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있다. 예전엔 얼마를 벌고 얼마를 쓰느냐만 생각하는 삶이었다. 그런데도 못 먹고 못 내보냈다. 걷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옆 사람을 돌아보게 되었다.”
걷기가 인생의 축소판이라면 계단과 언덕을 오르내리는 일은 인생의 극적인 전환이다. 걷기를 배운 지 한 달을 좀 넘긴 연극배우 김인수(54)씨는 첫날 자신이 언덕을 오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지난해 큰 교통사고를 당한 뒤 재활치료로 걷기를 택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복잡한 운동과 무대 몸짓을 익혀온 그가 걷기도 어려우리라는 생각은 못해봤다. 주부 임희준(56)씨는 엄지발가락이 바깥쪽으로 휘는 무지외반증을 고치고 싶어 걷기 시작했다. 불면증과 비만은 신체 퇴화의 덤이었다. 걷기를 시작하자 그가 처음 느낀 변화는 밤에 쉽게 잠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임씨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 20층 계단을 여러 번 오르내리는 취미가 생겼다. “체력이 붙고 자신감이 생기면 계단 오르기는 고행이 아니라 보약”이라고 한다.
언덕을 오를 때는 평지에서보다 가슴을 더 넓혀야 한다. 어깨와 배는 그대로 둬야 한다. 언덕에서는 발바닥 전체가 충분히 땅에 닿고, 계단에서는 발 앞부분만 계단 끝에 걸쳐진다. 모두 장딴지를 충분히 늘리기 위해서다. 내려오는 모습도 독특했다. 보통 산을 내려올 때는 중심을 잡기 위해 몸을 앞으로 숙이고 발가락 끝에 힘을 집중한다. 그런데 언덕을 제대로 내려가려면 몸을 똑바로 세우고 발뒤꿈치로 땅을 디디란다. 17년 넘게 물리치료사로 일해온 박혜경씨는 “얼마 전 이런 방법으로 등산을 했더니 공수부대 출신인 남편을 앞질렀다“고 자랑한다. “환자를 치료하는 데 가장 기본이 걷기다. 그런데 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많이 걷는데 좀처럼 차도가 없더라. 잘 걷는 방법을 가르치려고 나부터 배우기 시작했다”는 그다.
걷기 유행 10년. 탈것이 빨라질수록 사람들은 걸을 때의 육체적 노력과 감각을 그리워한다. 논밭을 오가며 일했던 옛사람들은 노동에 들어가기 전 준비운동으로 걷고, 노동에서 벗어나며 걸었다. 걷기를 배우는 사람들의 걷기를 배우는 것이 민망하다”면서도 “자세가 바르게 되니 걷기가 몸을 펴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마당쇠처럼 걸어라”.
이애주 서울대 교수도 요즘 걷기를 배운다. 오랫동안 ‘민중춤꾼’으로 살아오며 쌓인 피로로 무릎에 통증이 찾아왔단다. 다른 이유도 있다. 안광욱씨가 전하는 말에 따르면 “내 대에 한국 춤의 이론을 정립하고 싶은데 기본을 돌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걷기부터 시작하기로 했다”고 한다.
옛사람들은 뒷짐 지고 느리게 걷는 것을 선호했다. 앉을 때는 가부좌를 틀고 걸을 때는 팔자로 걸었다. 스포츠 역학과 결합한 요즘 걷기는 전통과는 멀어도 한참 먼 걸음 아닐까. 안광욱씨는 “전통이란 팔자걸음으로 느리게 걷는 양반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늘 부지런히 걸어야 했던 백성에게 더 가까운 것일 수 있다. 걸음이 빨라야 뒷짐이 내려가고 발끝은 저절로 나란해진다. 차라리 마당쇠처럼 걸어라”고 했다
걷기 열풍 이후로 수없이 많은 걷는 자세가 지나갔다. 건강관리 시민운동단체 ‘몸살림운동’에서는 뒷짐 지고 어깨를 펴고 걷기를 권하고, 뒤로 걷거나 호흡과 함께 걷는 명상법도 나왔다. 안광욱씨는 특히 뒷짐 지고 걷는 방법을 비판한다. “허리가 편하다는 것 말고는 장점이 없다. 걷기는 발끝부터 머리까지 전신을 교정하고 활성화하는 운동이다. 일부분만 돌보는 걷기 편법이 난무하는 게 문제다.” 약점을 살피며 걷는 방법을 택한다. 걸음이 우리를 설명한다는 말이 옳다. 또 다른 걷기 방법이 나올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지금 걸음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지향을 일러주기도 한다.
남은주 기자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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