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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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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쓰는 부고(訃告)

남이 쓰는 부고 대신 자신이 미리 써서 삶과 사랑 기록하는 이들
옛 사람들은 ‘생지’를 썼고, 대지진 뒤 일본에서도 유행
등록 2013-02-01 12:49 수정 2020-05-02 19:27

이것은 너무 늦게 도착한 부고다. “내 아내는 우리나라의 큰 성씨인 안동 김씨이다. 향년 22살. 그중 8년을 나와 함께 살았다. …아아! 당신처럼 현숙한 사람이 중간의 수명도 누리지 못하고 아들도 두지 못했으니, 천도라는 것이 과연 있는지 믿기 어렵다. 곤궁하던 시절에 나는 당신과 마주 앉아 작은 등불을 켜서 밤을 밝히며 책을 읽었다. 그러다 내가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울 것 같으면 당신은 그때마다 농담처럼 이렇게 말했다. ‘게으름 부리시면 제 부인첩이 그만큼 늦어집니다.’ 그때야 어찌 알았겠는가. 18년 뒤에 이 부질없는 문서 한 장을 당신의 영전에 바치게 될 줄을! 그 영예를 누릴 사람은 조강지처 당신이 아니니. 당신이 이일을 안다면 필시 한숨 쉬며 서글퍼할 테지. 아아, 슬프다!” 허균은 아내가 죽고 18년이 지나서야 ‘숙부인 김씨 행장’을 적으며 몇 번이고 애통해했다.

반대로 너무 이른 부고도 있다. 2003년 미국 방송 웹사이트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코미디언 밥 호프, 딕 체니 부통령, 피델 카스트로 등 7명의 유명인 부고를 게재했다가 급히 내린 일이 있었다. 언론사들의 관행대로 유명 인사들의 부고 기사를 미리 써놓았다가 실수로 노출한 것이다.
부고는 때를 타기 마련인데, 때맞춘 부고란 어떤 것일까? 옛사람들은 살아 있을 때 자신의 무덤에 묻을 묘지명을 미리 써두었는데 이것을 ‘생지’라 불렀다. 일찍 쓰인 부고는 “느긋하고 편안하게 내 명대로 살았으니 맑은 시절에 얼마나 다행이냐 만전옹아”(홍가신 ‘자명’)라며 자족하기도 하고, “결정해야 할 기로에서 우물쭈물하고만 말았을 뿐 끝내 자신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고 말았다”(이식 ‘택구거사 자서’)며 한탄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다른 사람이 쓴 글의 과장됨보다는 내가 한 말의 미더움을 취하는 것이 낫다”(권섭 ‘자술묘명’)는 생각은 한가지다.
지난해 미국 은 미리 자신의 부고를 써두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전하고 남아 있는 이들에 대한 사랑은 물론 숨겨왔던 잘못까지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미국 에 실린 부고 기사에 등장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낸 책 도 출간됐다. 책에 따르면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일본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 기사를 미리 써두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대지진 이후 멀리 있던 죽음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것이 되었다. 일본 사람들은 보통 온천을 찾아 쉬며 자신의 유서나 이력서를 만든다. 가족관계, 평소 삶의 철학이나 관심을 미리 기록하고 건강한 죽음을 주변 사람에게 아름답게 전하자는 의미란다.
죽음을 헤아리면 도리어 남은 삶이 길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경험을 거친 이들이라면 삶의 기쁨과 슬픔을 매 순간 헛되이 쓰지는 않을 터. 철학교사 안광복씨,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 김옥랑 동숭아트센터 대표가 세상과 자신을 위해 쓴 ‘자찬묘비명’을 보내왔다. 부고를 적어보기로 약속했지만 글로 맺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어쨌거나 “오는 곳 징험하고 가는 곳 따져도 갑작스레 답을 얻지 못한다”는 선사의 가르침대로 미리 천천히 짚어본 길이다.
남은주 기자mifoco@hani.co.kr
*참고 문헌 (유민호·메디치미디어), (심경호·이가서)



마땅한 곳으로 돌아감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
‘미리 보내는 부고장’을, 그것도 나 자신의 것을 나 스스로 쓰자니, 손이 떨린다. 컴퓨터 자판기에 얼핏 손이 나가지 않는다. 초등학교 이후로 다니던 각급 학교에서 시험지 받아든 순간이 이 지경이었다면, 오직 낙제만 거듭했을 것은 뻔하다.
만만치 않는 머뭇댐을 간신히 가라앉힌 끝에 겨우, 쓰게 되는 게 이 부고장임을 우선 강조해두고 싶다. 일찍이 무슨 일에 손대게 되면서 이토록 미적댄 적은 있었던 것 같지 않다. 한데 막상, 첫 글자를 쓰게 되면서 그 머뭇댐이 겁먹은 것이나 질린 것만은 아니기를 스스로 다짐 두고 싶어졌다. 뭔가 뜻깊고 보람된 것이 되기를 바라고 싶어지기도 했다.
예로부터 죽음을 두고는 ‘돌아간다’고 했다. 그것은 으레 가야 할 곳으로 간다는 뜻이다. 그나마 원천으로, 으뜸으로 회귀한다는 뜻이다. 부고의 부는 한자로 ‘訃’라고 쓴다. 보다시피 ‘말씀 언’(言)에 ‘卜’자가 붙어 있는데, 복이라고 읽는 이 卜은 ‘급히 가다’는 뜻을 갖추고 있다. 한자 사전에서는 卜이 赴와 같은 뜻이라고 돼 있다. ‘부임(赴任)하다’는 그 赴는 ‘워낙 간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부고는 떠나감을 알리는 것이 될 테지만, 이것으로 그칠 수는 없다. 그것은 赴가, 다름 아니라 ‘부고 부’라고 읽히는 한편으로 ‘이를 부’라고도 읽히기 때문이다. 목적한 곳에 가고, 도착하고 이르게 되는 것이 곧 赴다. 그래서 우리말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돌아간다’와 한자에서 죽음을 알리는 부고의 赴는 서로 뜻이 통하게 된다. 赴는 이르러서 마땅한 곳에 이르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돌아간다’는 것은 떠나온 원천으로 복귀함을 의미한다. 타향에 머물다가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래서 ‘돌아감’은 가서 마땅한 곳으로 가는 것이다. 귀향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죽음을 의미하는 돌아감은 모처럼 방학을 맞아서 제 고향으로, 제 집으로 돌아가듯 해야 하는 것이다. 한데 기왕 떠나온 것이면, 돌아가기 전에 해서 마땅할 일, 어김없이 치르고 마치고 해야 할 일을 마무리지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어야 한다. 과일이 늦가을이 들어서 익을 대로 익고서야 비로소 낙과, 이를테면 과일 떨어짐을 하는 것을 닮아야 한다. 주어진 일, 해서 마땅한 일들을 보람차게, 뜻깊게 마무리지어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는 그만큼, 미리 기획하고 노리고 벼르고 한 일들에 마지막으로 최대한의 정열을 바쳐야 한다. 인생의 최후 일전의 결말이 죽음이 되게 해야 한다.
여기까지 쓰고서도 내가 거둔 유종의 미를 굳이 가려가며 낱낱이 말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은 부고는 돌아갈 곳으로 돌아감을 통지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유종의 미’로 인생을 마무리짓게 됨을 알리는 통지서가 되기도 해야 할 것이라는 뜻을 밝히는 데서 그치련다.


서울 대학로 꼭두박물관에 전시된 상여 행렬. 김옥랑씨는 꼭두를 수집하며 인생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꼭두박물관 제공

서울 대학로 꼭두박물관에 전시된 상여 행렬. 김옥랑씨는 꼭두를 수집하며 인생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꼭두박물관 제공



꼭두의 당부
김옥랑 동숭아트센터 대표·꼭두박물관 관장
하늘이 무너졌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온 세상이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진 것 같았다. 사춘기 소녀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나는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아버지 같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 결혼에 대한 가족과 친구의 심한 반대로 나는 외로운 생활을 하게 됐고, 내 정체성에 대한 질문 속에서 많은 방황을 했다. 성공한 사업가의 아내라는 것은 하나의 역할일 뿐, 내 존재감을 느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형의 불변함’을 찾는 나의 목마름이 더욱 커졌다. 그러다가 고물상 바닥에 버려져 있다시피 한 꼭두를 만났고 그 모습에서 같은 처지의 나를 보았다. 그리고 꼭두를 살리는 것이 나 자신을 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됐을까? 나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서 당시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꼭두를 그렇게 하나둘 모으게 됐다. 몇십 점까지는 꼭두가 나의 것 같았다. 하지만 숫자가 늘어가자 더 이상 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꼭두를 우리 것으로 만드는 일에 몰두하게 됐고, 꼭두와 함께 나의 존재를 찾는 절박한 몸부림을 시작하게 됐다.
처음에는 꼭두극이란 공연예술로 출발했다. 주변에서는 나의 절박함은 모른 채, “웬 꼭두극이냐? 이왕 하려면 오페라 극단이나 만들라”는 소리를 했다. 그런 무심한 태도가 나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외로움의 시간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무수한 시행착오와 좌절을 겪었고, 모자람도 많이 느꼈다. 하지만 결핍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것을 채우려는 열정이 생겨났다. 내가 가진 용기나 도전의식은 분명히 내 결핍감에서 나온 힘이었다. 동숭아트센터와 옥랑문화재단의 설립은 그 과정에서 이루어졌고, ‘전통의 현재적 재창조’라는 동숭아트센터의 이념은 꼭두와의 만남에서 배운 것이었다. 그리고 2010년 4월에 꼭두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1970년대 후반에 꼭두를 만나고 30년 넘는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꼭두를 위한 집을 마련해줄 수 있게 됐다.
나는 꼭두를 만나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얻게 됐다. 그렇게 시작된 일이 평생 지속됐다. 꼭두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버려졌던 옛 전통이지만, 이제 우리가 함께할 것이 됐다. 꼭두는 항상 나에게 버려지고 소외된 영역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라고 이른다. 돌이켜보니 내 삶은 꼭두의 당부에 따른 것이었다, 평생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꼭두에는 이름도 모르는 우리 조상의 삶과 죽음에 관한 깊은 지혜가 담겨 있다. 이런 꼭두의 정신을 모든 이에게 알리고, 그 지혜를 살리기 위해 내가 가진 모든 힘과 열정을 바치는 삶, 그것이 내가 바란 삶이었다. 내가 죽은 뒤에 단지 나를 ‘버려졌던 꼭두를 되살려 우리와 함께 살게 만든 사람’으로만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제주 4·3 평화공원에 마련된 희생자들의 묘비에 저마다의 이름이 적혀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제주 4·3 평화공원에 마련된 희생자들의 묘비에 저마다의 이름이 적혀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나를 키운 건 8할이 두려움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대한민국의 1세대 철학교사. 등 대중을 위한 철학책을 60권 남짓 쓴 작가. 2033년 1월31일 새벽, 서울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향년 64살.
생전에 안광복은 자기 인생을 도스토옙스키에 견주곤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평생 빚에 쫓겼다. 별처럼 많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은 생계에 대한 절박함이 빚어낸 결과였다. 안광복의 집안은 한국전쟁 때 월남한 실향민이었다.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살아남아야 했던 부모 세대의 비장함은 그의 뇌리에 DNA처럼 박혀 있었다.
어린 시절, 그의 집은 악다구니로 들끓던 시장 한복판에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돈을 놓고 벌이는 세상의 비정함에 일찍 눈떴다. 청소년 시기에 그는 ‘이중(二重)의 콤플렉스’에 빠져들었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이 영혼의 한쪽을 짓눌렀다면, 다른 한쪽은 ‘품위 있는 삶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혔던 거다.
삶에는 먹고 사는 문제밖에 없을까? 이 물음에는 그가 철학과에 진학한 이유가 담겨 있다. 하지만 그는 생계 유지에 대한 공포를 끝내 떨쳐내지 못했다. 졸업 뒤 그는 ‘철밥통’을 좇아 교사가 된다.
교사가 된 다음 그는 엄청난 ‘생산성’을 보여주었다. 수업과 입시에 올인하면서도 매년 평균 2권 이상의 책을 펴냈다. 주말과 방학을 이용해서 해마다 70여 회 인문학 관련 강연을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안광복의 일상은 칸트와 비슷했다. 시계처럼 규칙적이었다는 뜻이다. 아침 8시 출근, 저녁 6시 퇴근. 저녁 식사 뒤 8시 취침. 새벽 2시에 일어나 5시30분까지 책을 읽고 글쓰기. 5시30분 다시 취침. 7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
그는 30년 넘게 이런 리듬으로 살았다. 항상(恒常)적인 일과가 높은 생산성을 낳았던 셈이다. 이런 기계 같은 생활에서 그는 과연 행복했을까? 사십 즈음, 안광복은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기 인생을 이렇게 갈무리했다.
“중국 철학자 펑유란 선생은 죽을 때 이렇게 말했다지요. ‘나는 살면서 내가 할 일을 모두 끝냈다.’ 저는 제 삶을 마칠 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치열하게 살았다. 그래서 후회가 없다.’”
그는 멈춰선 순간이 가장 힘들다고 했다. 두려움은 이를 이겨내려는 실천을 통해서만 이겨낼 수 있단다. 그는 생존에 대한 두려움, 품위 있는 삶에 대한 갈망을 부단한 공부를 통해 넘어서려 했다. “치열하게 사는 사람만이 세상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그가 입에 달고 살았던 삶의 모토다.
그의 책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영미권에서도 널리 번역돼 읽힌다. 일부 학자들은 그를 어설픈 문체로 학문의 격을 떨어뜨린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내몰곤 한다. 반면 쉽고 간명한 글로 철학의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많다. “경제에만 매달리는 사회는 먹고 사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위대한 욕망을 품는 사회만이 위대한 역사를 열 수 있습니다. 제가 평생 욕망이론에 매달렸던 이유이지요.” 이 말은 철학자로서, 철학교사로서 안광복의 인생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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