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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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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 투 ‘처월드’

처가살이, 잦은 방문 등 처가와 접점 많아진 사위들이 토로하는 ‘처월드’의 애로… 해법은 결국 부부 둘의 관계에 있어
등록 2012-10-27 14:33 수정 2020-05-03 04:27
지금 많은 젊은 부부들은 함께 아이를 키우고 정서적 도움을 주는 가족으로 처가를 택한다. ‘딸이 모시는 건 효가 아니라 욕’이라는 시월드의 가치관이 잊혀지는 중이다. 사돈 간의 미묘한 갈등을 소재로 한 문화방송 주말드라마 <그 여자네 집>의 한 장면.

지금 많은 젊은 부부들은 함께 아이를 키우고 정서적 도움을 주는 가족으로 처가를 택한다. ‘딸이 모시는 건 효가 아니라 욕’이라는 시월드의 가치관이 잊혀지는 중이다. 사돈 간의 미묘한 갈등을 소재로 한 문화방송 주말드라마 <그 여자네 집>의 한 장면.

“동생이 갖고 싶다던 푸들이 너다. 잡종인 줄 알면서도 사줬다. 그런데 왜 주인보고 짖는 것이냐.” 드라마 에서 전노민(서영욱 역)은 김상중(강동윤 역)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디서 많이 듣던 대사다. 15년 전 영화 에서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동우가 쓰던 장난감은 하나도 안 버리고 다 보관했지. 너도 그중의 하나니까 당연히 여기 있어야 해. 특히 동우는 널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하거든.” 주인공에서 엑스트라로, 하다못해 애완견으로 신분 하락하는 곳, 이곳은 ‘처월드’다.

‘시월드’ 찍고 ‘처월드’로

지금 많은 부부들이 시월드를 떠나 처월드로 간다. 시월드는 시부모와 시누이 등 ‘시’자가 지배하는 세상을 말한다. 아들 중심의 법을 시어머니가 수렴청정해온 이 왕국은 한번 집권하면 적어도 20년 이상 철권통치다. 시대가 바뀌어도 그다지 변하지 않던 그곳이 흔들리고 있다. 시월드라는 말 자체가 ‘시댁’이라는 높임말로 불리던 그곳을 현실과 동떨어진 놀이동산쯤으로 끌어내리는 뜻 아니던가. 드라마 이 인터넷 게시판에서 쓰이던 시월드라는 말을 공론화한 데 이어, 트위터에 ‘시월드 옆 대나무숲’이라는 계정도 열렸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며느리들이 ‘이상한 시월드’에서 겪은 일을 털어놓는 곳이다. 최근 방영을 시작한 드라마 에서는 남편을 아내로 변하게 해서 시월드에 들여보냈다. 남자가 며느리 노릇 한다면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고. 그럴 필요 없다. 이미 많은 남자들은 자진해서 시월드에서 빠져나오고 있다.

의사인 김아무개(44)씨는 8년 전 연구원으로 일하는 남편과 결혼했다. 당초부터 남편과는 가부장적 결혼생활을 하지 말자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나 시댁은 전혀 합의할 생각이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명절이었다. 당직이든 야근이든 가리지 않고 며느리를 불러대고, 용돈이나 선물보다 뼛골 빠지는 며느리의 노역이 있어야 명절다운 명절이었다. 동서와 시어머니 사이의 미묘한 감정 기류 속에서 눈치보고 갈등을 견디는 일은 덤이었다. 2년 정도 명절을 치른 뒤 남편에게 조용히 하소연했다. “이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 열심히 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남편은 “내가 해결하겠다”며 부모님 집에 갔다. 불쑥 합의이혼 서류를 내밀었다. “저 이 사람과 이혼했습니다. 이제부터 이 사람은 며느리가 아니니까 만날 일도 없고 부를 일도 없으니 그리 아십시오. 명절에는 저만 오겠습니다.” 물론 실제 이혼은 하지 않았다. 아내 처지에선 시댁과의 돌연한 의절에 불안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지만, 남편이 중간에서 들볶이느니 그 편을 택했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명절이 되면 아내는 친정에, 남편은 시댁에 간다. 처가에 오라고 부르지도 않았는데 남편은 시댁에서 돌아오는 길에 처가에서 밥 한 끼 먹고 가는 걸로 명절치레를 끝낸다. 아이가 태어나자 할아버지 집에도 가지만 친가에서는 재결합한 것쯤으로 여기는지 더 이상 며느리를 찾지 않는다.

김재영이 쓴 소설 속 정육점집 사위는 처가에 얹혀 사는 아내와 아이를 위해 장인어른 비위를 맞추기에 여념이 없다. 노인들의 주름진 갈피갈피마다 숨어 있는 속때를 알뜰하게 벗기는 목욕탕 서비스는 기본이요, 동네 노인들까지 모시고 가서 쌍화차부터 새우젓갈까지 돌리며 이벤트를 한다. “처가살이 향후 6개월은 발 뻗고 잘 수 있겠다. 태평성대로다!” 이것이 오늘날 처월드에 임하는 사위들의 자세다.

‘다른 집 사위는 아들 같다던데’

이 취업포털 사이트 잡코리아(www.jobkorea.co.kr) 회원인 직장인 325명에게 물어보니 ‘한 달에 한 번 이상’,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처가를 찾는다는 회원이 30.1%와 16.9%로 나왔다. 30대 초반 회사원 이아무개씨는 결혼하며 아내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처가 근처에 신혼집을 얻었다. 그러나 매일 시도 때도 없이 집에 와서 밥 먹고 가라고 부르거나, 주말이면 외손자와 놀아주겠다며 처가 식구들이 찾아오는 통에 쉴 틈이 없다. 그는 다음엔 반드시 친가 근처로 이사 가겠다고 벼르고 있다. 별다른 격식이 없던 집안에 며느리만 들어오면 온갖 의전행사가 생겨나는 곳이 시월드라면, 대부분 처월드는 사위를 얻자마자 극성스럽게 친목을 도모한다. “요즘은 남자들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처가 흉을 보고 애로사항을 토로하게 된다”는 장아무개(31)씨는 처가가 노는 걸 좋아해서 주말마다 여행이며 행사에 따라다녀야 해서 사생활이 없단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사위 처지에서는 어처구니없을 때가 많다. 개신교 목사를 장인으로 둔 박아무개씨는 “일요일마다 억지로 교회에 나가야 하는 것은 그래도 참겠는데, 교회의 모든 신자가 처가 식구들처럼 구는 것은 견디기 어렵다”고 했다. 결혼생활을 걱정해서 한마디씩 거든다는데 듣고 보면 모두 아내를 위한 이야기인데다 개중에는 바람직한 시부모상까지 당부하는 사람들이 있어 처가 공동체에는 얼씬도 하기 싫어진다는 것이다. 시어머니만 며느리의 외모를 트집 잡는 게 아니다. 한 기업 홍보팀에서 일하는 신아무개씨는 이렇게 말한다. “처가에 가면 장모가 날 붙들고 ‘살이 부쩍 찐 거 같다, 다리가 더 짧아 보인다, 탈모는 없느냐’며 걱정 아닌 걱정을 한다. 솔직히 아내 외모도 지적할 부분이 많지만 참는다. 왜냐고? 거긴 처월드니까.” 다른 직장인들의 의견도 들어보았다. “장인어른과 멀뚱히 앉아 있기가 애매해서 차라리 머슴처럼 일한다.” “처제들 들을까봐 화장실에서 소변 볼 때도 얌전히 앉아서 본다.” 처월드 속 사위들의 애로가 만만치 않다. 잡코리아 설문조사에서 기혼 남성들은 처갓집에서 듣기 싫은 말 1위로 ‘다른 집 사위는 아들 같다던데’(25.3%)를 꼽았고, ‘결혼했으면 독립된 딸의 가정을 인정하기’(15.7%)를 원했다. 게다가 기혼 남성 26.5%는 ‘원래 남자에게 처가는 부담스러운 존재’라고 했으며, 21.7%는 ‘처가의 경제적·시간적 요구가 지나쳐 부담스럽다’고 답했다.

‘처월드’의 강세는 남자들이 가부장적 권력에서 탈출해 부부관계에 집중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결혼은 더 이상 양가의 결합이 아니라 부부가 행복하기 위한 제도로 자리잡느라 진통 중이다. 전라도 남자와 경상도 여자의 결혼을 그린 영화 <위험한 상견례>.

‘처월드’의 강세는 남자들이 가부장적 권력에서 탈출해 부부관계에 집중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결혼은 더 이상 양가의 결합이 아니라 부부가 행복하기 위한 제도로 자리잡느라 진통 중이다. 전라도 남자와 경상도 여자의 결혼을 그린 영화 <위험한 상견례>.

육체적 애로가 아니라 정서적 소외

정신분석가면서 상담센터 ‘닛부타의 숲’을 운영하는 이승욱 소장은 “남자들은 자신은 빠지고 어머니·아버지와 아내가 잘해나가기를 바라지만, 딸들은 남편이 자신의 집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처가에서 사위의 비중은 훨씬 가볍고 적다”고 했다. 이 소장은 “사회적으로 보면 본가와 엄마를 자신의 정서적 근거지로 삼았던 남자들이나 친정에 대한 애증이 남아서 탯줄을 끊지 못하는 여자들이나 모두 어른이 되지 못한 채 결혼했던 것”이라고 분석한다. 사교육부터 대학까지 부모에게 끌려다니며 자랐기에 결혼하고도 부모 품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여럿이다. 게다가 결혼한 딸을 여전히 중요한 가족의 일원으로 붙잡아둔 부모도 많단다. 대구 사이버대 심영섭 교수(상담심리학)의 진단은 이렇다. “여자들은 친정 근처에 살면서 양육에다 경제적·정서적으로 실질적인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다. 남자 처지에서는 가족 경계뿐 아니라 자존감의 경계까지 침해받는다는 느낌이 들어 스트레스를 받는다. 게다가 시가는 아들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처가는 아들로 여기지 않으니 남자들이 돌연 고아가 된 셈이다. 그러나 시집살이 전통이 유구한 한국에서 대부분의 남자들은 처가에서 여자들처럼 일하지 않는다. 시월드와는 경중이 다르다.” 요컨대 사위들이 처월드에서 겪는 문제는 육체적 애로가 아니라 정서적 소외인 셈이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처가와의 갈등으로 상담한 사례를 보면 대부분 아내와 처가가 지나치게 밀착하거나 장인·장모가 개입한 경우다. 아이 양육 때문에 처가와 합쳐 살거나 아내가 친정어머니 사업장에서 일해 남편이 소외감을 느끼거나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결혼한 딸의 월급통장을 넘겨주려 하지 않는 장모에 대해 피해의식이 크다”며 이혼할 수 있는지 문의한 상담자도 있었다.

연리지 가족부부연구소 박성덕 소장은 “부부 치료를 하다 보면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요’ 하는 남자들이 있다. 대가족에서 군림하다 핵가족에서 왕따가 된 남자들이 안타깝고 측은하지만 한번 진화한 시스템은 환원되지 않는다. 남자들이 변화를 받아들이고 살아남아야 한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남자들도 시월드의 피해자였다. “가족은 권력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 ‘당신은 내 편’이라는 정서적 울타리를 둘러야 하는데, 부부의 울타리를 허용하지 않는 가부장적 체제에서는 모두 외로웠다.” 박 소장의 말이다. 지금은 누구나 정서적 친밀감을 중시하고 부부가 행복하지 않으면 같이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혼율이 치솟고 처월드가 흥하는 와중에 남자들이 정서적·감성적 소통을 배우는 중요한 시기를 걷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의 핵심은 부부, 그것도 부부 각각이 아니라 둘의 관계다. 둘이 결정하고 책임질 고유한 영역이 있는데, 친정이든 시집이든 여기에 자꾸 끼어들면 병든 가족이 된다. 부모와 정서적 거리를 먼저 유지하라. 부모에 맞서 배우자 편을 들 수 없다면 시집도 친정도 가지 않는 것이 좋다. 간섭하지 말라고 주장을 폈는데도 부모가 못 떠나면 자식이 떠나야 한다.” 그의 처방이다.

부부 사이가 두텁고 짐이 가볍다면

한국 처월드를 겪은 백인 사위의 경험담도 들어볼 만하다. 지난해 미국인 작가 벤 라이더 하우는 한국인 처가와의 동거·동업기를 그린 를 펴냈다. 몇 달만 한국의 처가에서 살다 나올 작정이었다는 작가는 8년 동안 그곳에 살았다. “운명이 우리의 독립을 허락하지 않았다. 몇 번 그런 일을 겪고 나자 더욱 체념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우리 부모님이 걱정하던 것처럼 점점 의존적으로 됐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장모님의 중력 자장을 벗어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질량이 안 돼서인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무게를 늘려야 했다.”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처월드를 빠져나가는 데는 시월드를 빠져나오는 것만큼 어렵거나 오래 걸리지는 않으리라는 점이다. 부부 사이가 두텁고 짐이 가볍다면 말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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