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순례길이었다. 7월27일 금요일, 오전부터 지독한 뙤약볕이 내리쬐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공기는 숨 쉴 틈 없는 열기로 조밀하게 채워졌다. 그런 진공관 같은 공간을 걷는 이들이 있었다. 교통 표지판에서 ‘지산리조트’라는 글자가 보이는 순간부터, 길은 그러기를 작정이라도 한 듯 막히기 시작했다. 내비게이션은 5km가 남았다고 했지만 막히는 길에서는 의미 없는 숫자였다. 성질 급한 몇몇 사람들은 차문을 박차고 나와 걷기 시작했다. 이날은 ‘문제의’ 라디오헤드가 지산에서 공연을 하는 날이었다. 첫 내한 공연이다. 음악팬들은 지산 록 페스티벌 라인업이 뜨자 탄성을 질렀다. 20년째 수많은 밴드에 의해 변주돼온 (Creep·1993)의 주인공이, 애타게 불러도 오지 않던 당신이 드디어 오신다는 거다. 그 라디오헤드를 영접하러 가는 길이다.
“감사합니다” 사소한 팬서비스도 없었지만
미국 우드스탁 록 페스티벌의 탄생기를 그린 영화 에서 50만 인파가 몰려 고속도로가 정체되고 조용한 시골 동네가 아수라장이 된 장면이 현실에서 벌어진 듯했다. 비단 라디오헤드 때문만은 아니다. 처음 내한하는 스톤로지스, (She)를 부른 엘비스 코스텔로를 비롯해 들국화, 김창완밴드, 장필순, 이적 등 대중음악의 황금기인 1980~90년대를 추억하게 하는 연주가들, 이제는 ‘떠오르는 별’을 넘어선 검정치마와 아울시티까지! 2차선 도로 옆 인도도 없는 좁은 길, 사람들은 뒷통수에 내리꽂히는 햇볕을 고스란히 맞아가며 앞으로 만날 임을 향해 한마음으로 걷고 있었다.
차도, 사람도 꾸역꾸역 공연장에 도착했다. 지산 록 페스티벌을 주관하는 CJ E&M의 집계에 따르면 이날 공연장을 찾은 이들은 3만5천 명으로, 평일이었음에도 둘째날 3만2천 명, 셋째날 3만4천 명에 비해 가장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다.
밤이 깊어 라디오헤드는 가장 큰 무대인 빅탑 스테이지의 헤드라이너로 무대에 올랐다. 내심 라이브로 들어보길 바랐던 는 끝끝내 불리지 않았고, 한국말로 하는 ‘감사합니다’ 같은 사소한 팬서비스 또한 없었다. 대신 이들은 손톱 끝의 에너지까지 모조리 사용해 노래하고 연주하고 몸을 흔들었다. 공연은 앙코르의 앙코르를 거듭해 40분을 초과, 2시간을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진행됐다. 초기 음반의 어쿠스틱한 감성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다양한 장비와 전자음을 이용한 음악은 그들의 방식대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세련된 무대 구성도 돋보였다. 무대 옆 커다란 스크린은 톰 요크, 드러머 필 셀 웨이의 얼굴과 기타를 치는 조니 그린우드의 손 등 다섯 멤버가 연주하고 노래하는 모습을 클로즈업한 화면을 나눠 담았다. 무대 멀리에서도 영상을 통해 그 소리가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지를 알 수 있었다.
밤 11시40분이 되어서야 공연이 끝났고, 순례자로 가득한 인파는 이리저리 흩어지기 시작했다. 음악에 취한 채 풀밭에 누워 잠을 청하는 이들이 있었고, 작은 무대에서 공연하는 밴드를 응원하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아주 많은 사람들은 공연장 밖으로 나와 집으로 향했다. 예의 2차선 도로는 더 심한 체증이 일었고, 2시간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꼼짝 못하고 길에 묶여 있었다.
슈퍼소닉, 일본의 서머소닉을 그대로
지산 록 페스티벌은 7월27~29일 3일간 총관객 약 10만1천 명을 동원했다. 2010년 8만 명, 지난해 9만3천 명 등 해마다 약 1만 명의 관객을 더 불러모으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록 페스티벌이 파이를 키워갈 수 있었던 것은 관객의 힘이 크다. 라디오헤드가 데뷔 20년 만에 화제를 모으며 지산을 찾은 이유도 들여다보면 관객의 힘 덕분이다. CJ E&M 음악사업부문 성나혜 대리는 “지난해 지산 록 페스티벌에 헤드 라이너로 섰던 스웨이드가 라디오헤드에게 관객 분위기를 아주 긍정적으로 전해 섭외가 한결 쉬워졌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공연 직후 SNS 등을 타고 흘러나오는 관객 리뷰에서 올해 지산은, 최고의 라인업인 동시에 최악의 관객 배려였다고 평가받았다.
이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국내 록 페스티벌 시장은 판을 키워나가고 있다. 올해는 지산을 필두로 8월10~12일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8월14~15일 슈퍼소닉 페스티벌 등 굵직한 여름 음악 축제들이 기다리고 있다.
한국의 록 페스티벌은 1999년 인천 송도에서 열린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을 전신으로 둔다. 1961년 시작한 가장 오랜 역사의 음악 축제인 영국 레딩앤리즈 페스티벌, 80개가 넘는 무대 등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열리는 영국의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까지는 아니겠지만, 1980~90년대부터 폭발적으로 쌓아온 음악적 감성이라면 우리만의 음악 축제도 하나 가져봄직했다. 그러나 축제 당일 사상 유례없는 폭우가 쏟아져 행사는 첫날 공연만 마무리한 채 유야무야 끝났다. 이후 더 이상의 페스티벌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아쉬움은 2006년까지 이어져 인천 펜타포트 페스티벌을 출범시키는 힘이 됐다. 첫해 펜타포트는 플라시보, 블랙아이드피스 등 걸출한 밴드를 불러모으며 록 마니아들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2009년 펜타포트에서 해외 라인업을 주로 담당해오던 스테프들이 갈라져 나와 지산 록 페스티벌이 열렸다. 지난해까지 지산은 탄탄한 해외 라인업과 비교적 모던한 록 위주로 꾸려 대중화를 시도했고, 펜타포트는 전통의 록 페스티벌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하드한 록 마니아를 흡수하며 양대 페스티벌로 군림했다. 올해는 여기에 하나 더 추가된다. 일본의 서머소닉 페스티벌의 콘셉트를 그대로 가져온 슈퍼소닉 페스티벌 또한 강력한 라인업으로 티켓 판매 사이트에서 상위를 차지하며 높은 예매율을 기록하고 있다.
“누가 더 유명한 밴드를 몰고 오냐는 경쟁”
향유할 수 있는 문화의 장이 넓어진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이는 없겠지만 우려의 시선 또한 따른다. 우리는 역사에 유래없는 록 페스티벌 번성기를 지나고 있지만, 10년쯤 후에 지금을 돌이켜 본다면 셋 중 어느 것을 구분하기가 힘들지도 모른다. 음악평론가 김학선씨는 2000년대 중반부터 대규모 록 페스티벌이 속속 론칭하고 있지만 자기 색깔이 분명하지 않음을 꼬집는다. “록 페스티벌 시장이 커진 것은 결국 관객 덕분인데, 이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듯하다. 라인업에만 치중한 채 누가 더 유명한 해외 밴드를 데려오냐를 경쟁하는 모양새가 됐다.”
음악평론가 차우진씨는 록 페스티벌의 성장이 국내 음악 시장의 성장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라디오헤드와 같은 유명 밴드의 방문으로 록 페스티벌의 입지는 한층 올라서겠지만 밴드의 운영이나 노하우가 한국 음악가들에게 전수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록 페스티벌에서 즐기는 마음을 서울 홍익대 등지에서 새로 생기는 자잘한 공연이나, 작은 무대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는 기획자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이어나갈 필요가 있다.”
혹자는 라디오헤드의 라이브를 들은 것만으로도 일생의 과업 중 하나를 달성했다고 말하지만 록 페스티벌 무대가 점점 확장하는 지금, 더 건강하게 소비하기 위해 그 뒤의 이야기에도 주목해야할 때다. 올 여름 록 페스티벌의 문을 연 지산의 첫째날 공연에서 국내의 걸출한 올드락 밴드 여럿을 무대에 초청한 것이 그런 가능성이길 바란다.
세상의 끝인 듯 내리쬐던 햇볕이 거짓말처럼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을 때, 빅탑 스테이지에 오른 김창완밴드가 그 첫 번째다. 등 산울림의 히트곡이 이어졌다. 공연 초반에 인사를 하며 김창완씨는 두 팔로 하트를 만들어 “락은 사랑, 락은 자연 사랑, 락은 생명 사랑”이라고 말했다. ‘아니, 저렇게 교조적인 이야기를, 저렇게 느끼한 포즈를, 어찌 저리 담백하게 말하는 아저씨가 다 있지?’라는 생각마저도 어쩌면 내밀한 교감일 수 있다. 관객과 눈을 맞추며 사랑을 나누던 공연은 에서부터 온통 어우러졌다. 무대 아래 서 있던 관객들이 기차를 만들어 달리기 시작했다. 에서 해체된 기차는 제각기 신나게 껑충껑충 뛰었다.
올드록 밴드, 교조적 사랑과 명불허전
그린 스테이지에서 헤드라이너로 무대에 오른 들국화의 무대는 명불허전이었다. 들국화는 14년 만의 재결성이라는 말이 무색한 공연을 펼쳐냈다. 터질 듯한 목청으로 을 부를 때 관객들은 세대를 막론하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2010년 지산 록 페스티벌에 참여했던 밴드 우쿨렐레 피크닉은 어느 인터뷰에서 “록 페스티벌은 누가 더 관객들을 미치게 하느냐에 대한 싸움”이라고 말했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이날 들국화와 김창완밴드는 이긴 싸움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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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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