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가을, 그것도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나는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사건을 낯선 도시에서 경험했다. 내 영혼에 깊이 각인된 한 사건을 말이다.
학회에 초청받아 대전에서 수업을 마치고 급하게 터키 이스탄불행 비행기에 올랐다. 학회 장소는 터키 서부, 이스탄불에서 140km 떨어진 테키르다라는 작은 도시. 마르마라해의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도시로, 질 좋은 포도와 체리의 산지로 유명한 휴양지다.
공항에서 차를 렌트해 지도가 알려주는 대로 그곳으로 향했다. 이스탄불에서 출발한 시간은 오후 3시. 내 발표는 저녁 8시, 학회의 마지막 강연이었다. 오후 5시 테키르다에 거의 도착할 무렵,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학회 장소에 대해 아는 정보라고는 테키르다라는 사실밖에 없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나를 초청해준 조직위와 수차례 전자우편을 주고받았지만, 학회 장소의 구체적인 정보는 들은 기억이 없다. 내가 왜 그들에게 진작 물어보지 않았을까? 왜 테키르다라는 정보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을까? 아마도 나는 테키르다에 도착하는 순간 내 이름이 크게 적힌 거대한 플래카드를 마주칠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어디서 학회가 열리고 있을까? 우선 이 도시에서 제일 큰 호텔들을 뒤졌다. 서너 호텔을 가보았지만 그곳에선 열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학에서 열리는 걸까? 두 개의 대학 캠퍼스에 들어가봤지만 학회가 열린다는 포스터나 플래카드는 어디에도 없었다.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 전자우편을 다시 뒤져보고, 학회 홈페이지에도 들어가 확인했지만, 장소라는 단어 옆에는 테키르다라는 도시명 외에는 어떤 것도 없었다.
미친 듯이 낯선 도시를 차로 휘젓고 돌아다니길 3시간. 8시가 임박해오는 상황에도 나는 이 도시 어디에서 학회가 열리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학회 관계자들은 지금 얼마나 애가 탈까? 8시 시보가 라디오에서 울리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8시’라는 시간을 자동차 안에서 이렇게 맞이하고 있다니. 밤 10시가 될 때까지 이제는 도착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학회를 찾아 이 도시를 나는 헤매고 또 헤맸다. 어찌나 돌아다녔던지, 더 이상 낯설지도 않았다.
밤 11시가 되어서야 겨우 ‘포기’가 되었고, 그제야 정신을 들었다. 그사이 눈여겨본 근사한 호텔에 투숙해 하룻밤을 보냈고, 아침은 20분쯤 떨어진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식사 뒤엔 간밤에 봐둔 예쁜 꽃길을 산책했고, 작은 상점들이 모인 거리로 달려가 구경도 열심히 했다. 해변이 예쁜 바닷가를 거닐며 학회를 놓친 이 도시의 정취를 즐겼다.
문득 나는 내가 이 도시에 대해 꽤 많은 걸 지난밤에 알게 됐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이 도시의 지도가 머릿속에 새겨지고, 학회장소를 찾아헤매던 그 순간에도 내 뇌는 근사한 호텔과 멋진 산책로, 예쁜 바닷가를 잊지 않고 기억해둔 것이다.
여행에서 길을 잃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지도 위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인생에서 중요한 건 ‘지도를 그리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방황하고 길을 찾아헤매는 시간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 대해 애정을 갖고 지도를 그리는 시간을 선사해준다. 적극적인 방황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길을 잃어보지 않은 자는 지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내 영혼에 아로새겨준 도시가 바로 테키르다다.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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