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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은 그리로 망명 간다

김나정 소설가의 스머프 마을… 고만고만하게, 푸릇푸릇한 이들이 어울려 사는 이상향
등록 2013-03-09 04:06 수정 2020-05-03 04:27
이름이 곧 성격인, 스머프 마을에선 상처를 주고받을 일도 없으니 힐링 타령도 그친다. 성격 개조를 강요하는 대신 단점마저 특성으로 여겨준다. 한겨레 자료

이름이 곧 성격인, 스머프 마을에선 상처를 주고받을 일도 없으니 힐링 타령도 그친다. 성격 개조를 강요하는 대신 단점마저 특성으로 여겨준다. 한겨레 자료

내비게이션에 찍어도 그 마을로 가는 경로를 알려주지 않는다. ‘스머프 마을’, 어린 시절 내 이상향이었다. 입주만 허락된다면 피부색쯤이야 바꿔도 좋다고 생각했다. 온몸이 쪽빛이면 고려청자가 아닌가. 사시사철 하얀 반바지와 흰 모자 차림도 감당하겠다. 스머프가 명품을 탐하랴. 다른 아이들의 메이커 운동화를 힐끔거리던 시절이었다. 빨랫줄도 세탁기도 없는데, 옷은 한결같이 새하얗다. 토요일 저녁마다 실내화를 빨아야 하는 내 처지엔 마법 같았다. 스머프들은 잔치를 하면, 똑같은 접시에 수프를 나눠 먹는다. 도시락 반찬을 손으로 가리지 않아도 된다.

스머프 마을에는 심각한 갈등도 없다. 맞수인 가가멜은 어벙하다. 스머프를 잡아다 수프를 끓이겠다는 허무맹랑한 음모는 번번이 실패한다. “스머프가 밉다. 정말 밉다”란 발언에는 애증이 뒤섞여 있다. 그가 스머프를 미워하는지, 함께 놀려는지 진의조차 의심스럽다. 수족 노릇 하는 고양이 아즈라엘은 고작 히스테리나 부린다. 스머프와 가가멜 일당은 서로의 일상에 윤활유 역할을 한다.

그 마을에선 폭탄마저 장난감이어서 폭발은 자지러지는 웃음으로 이어진다. 강도·살인·성폭행 등의 ‘범죄가 없는’ 마을이다. 감옥도 경찰서도 법원도 없다. 치과와 성형외과를 비롯한 병원이 없다. 공동묘지도 납골당도 보이지 않는다.

인간관계로 골머리를 앓지도 않는다. 스머프는 이름이 곧 성격이다. 예상치 못한 행동이나 표리부동한 행태로 당황하지 않아도 된다. 허영이는 거울만 볼 테고, 똘똘이야 어수룩하게 잘난 척을 할 게다. 상처를 주고받을 일도 없으니, 힐링 타령도 그친다. 꼬마요정들이 완벽해서가 아니다. 면면을 살피면 허점투성이다. 주책이는 칠칠맞지 못하고, 투덜이는 불평을 일삼으며, 욕심이는 식탐이 강하다. 하지만 스머프 마을은 누구든 끌어안아준다. 똘똘이나 허영이가 자기애성 성격장애로, 투덜이가 반사회성 인격장애로 진단받지 않는다. 성격 개조를 강요하는 대신, 단점마저 특성으로 여겨준다. 타고난 대로 하고픈 일을 하고 살며, 재산은 모두의 것이다. 버섯집은 평수가 똑같다. 지도자인 파파스머프는 바지만 빨갛지, 꼰대가 아니다. 의 주인공은 누굴까? 스머프들(The Smurfs)이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다. 고만고만한 친구들이 생긴 대로 어울려 산다.

유토피아는 거개가 마을이다. 미래 소년 코난의 하이하버, 뽀로로 친구들의 눈 덮인 숲 속 마을, 톨킨의 호빗 마을. 몸집만 큰 스머프, 아바타의 나비족도 촌락 거주자다. 무릉도원은 무릉시티가 아니다. 대도시에서 바글거리는 스머프들을 떠올리면, 손발이 오글거린다. 무심한 얼굴로 지하철을 기다리는, 푸른 꼬마들은 짠하다. 밟히지 않으려고 허둥대는 얼굴은 파리하다. 유별나고, 조그만 사람들은 마을에서 무리지어 살아야 한다. 반나절이면 이웃 모두에게 떡을 돌릴 수 있는 스머프 마을. 고만고만한 친구들과 푸릇푸릇 살고 싶었다. 내 마음은 가끔씩, 그리로 망명 간다.

김나정 소설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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