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 세계지도를 펼쳤더랬다. 그리 가본 곳도 없으면서. 유럽과 아시아 몇 곳을 이리저리 더듬으며 기분이 좋아졌다. 지명이 환기시키는 나의 기억들, 볕이라든가 공기, 어떤 사람들, 느슨한 대화, 기차의 흔들림, 버스 안의 막막한 냄새…. 한데 그게 다였다. 그건 여행이었고, 여백에 대한 의무감과 생존 본능이 뒤범벅된 시간이었으니, 머물러 내 것이 되었다 하기엔 그저 짧고 애틋한 기억이다. 세계지도를 도로 말아버린다. 멀리 가지 말자. 내 도시는 서울이다. 진하고 흐릿한 내 생의 점들이 이곳의 거리, 마을에 가득하다. 그러니, 어쩐지 부족해 보여도, 아름답다고 할 수 없어도 어쨌든 내 영혼은 여기에 머물러 있다. 그중에서도, 도드라져 어쩐지 만져질 것 같은 시기가 담긴 곳이 있다. 이따금 명동이라고 불리는 곳. 하지만 명동은 아니고 그 건너편, 남산 아랫자락에 있는 나의 소울 시티, 서울시 중구 예장동.
열아홉. 다 알았으나, 실은 아무것도 모르던 나이. 아침이 오면 읽지도 않을 이름 멋진 철학자들의 책을 옆구리에 끼고 예장동으로 갔다. 학교가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수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교실을 찾는 대신, 그곳에 가득한 골목과 낡아가는 것들을 찾았다. 그곳에 숨어, 또래의 어린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그들은,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질주하거나, 미친 듯이 노래를 불렀다. 시에 대해 소설에 대해 떠들었고, 아무렇게나 욕설을 뱉었다. 늘 함께는 아니었다. 그곳엔 혼자 있기도 쉬웠다. 아무 골목에나 들어앉아 나오지 않으면 되었다. 볕이 드는 담장에 등을 대고 앉아서 책을 읽었다. 수많은 작가와 시인들이 내게 말을 걸었다. 시인이 되고 싶어졌다. 비가 오면 술을 마셨다. 그렇게 치기를 광기로 가장하는 법을 배워갔다. 이름을 긁는 기분으로 시를 썼지만, 좀처럼 어떤 희망도 보이질 않았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나는 예장동으로 갔다. 어쩌면 그때 나는 그곳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을지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러하다. 좁았으나, 좁은 곳이 아니었다. 혼자가 무엇인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배우고 있었지만, 그때는 몰랐다.
스물. 나는 예장동을 떠났다. 떠날 수밖에 없기도 했지만, 도망치고 싶었다, 고 생각했다. 그 모든 것이 지겨웠다. 다신 여기에 오지 않을 거야. 그래야 더 크고 멋진 사람이 될 것 같아. 몇 없던 친구 중 하나에게 말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약속은 지킬 수 없는 것이고, 그곳을 떠날 수 없음을. 거리와 시간을 두어도, 언제나 그곳에 있음을 이제는 알고 있다. 이제 학교는 거기에 없다. 어린 예술가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과 어울렸던 술집들도 함께 사라졌다. 여전히 있는 것은, 햇빛 아래 낡아가는 것들 그리고 골목. 가끔 그곳을 찾아가 아무 골목의 볕 아래서 책을 읽는다. 중얼거리면서. 그러면 가까운 곳에서 내가 두고 여태 거둬가지 못했던 나의 진심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게 다가오려고 그러는 것처럼. 그 소리에 몇 번인가 운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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