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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하게 애매하게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무진, 현대문학의 ‘소울 시티’
등록 2013-06-27 16:29 수정 2020-05-03 04:27
“여귀가 뿜어 내놓은 입김” 같은 안개 속에서 당당하고 명료한 것들은 힘을 잃는다. 안개 도시 ‘무진’은 현대문학의 고향이며 나의 고향이다.윤운식

“여귀가 뿜어 내놓은 입김” 같은 안개 속에서 당당하고 명료한 것들은 힘을 잃는다. 안개 도시 ‘무진’은 현대문학의 고향이며 나의 고향이다.윤운식

독서로 여행을 대신하기 시작한 지 오래됐지만 삶이 이 지경이 된 것에 불만은 없다. 내게는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동경보다는 읽지 못한 책에 대한 갈급이 언제나 더 세다. 그러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마이 소울 시티’가 어디일까 떠올려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가본 곳이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생각을 시작하자마자 소설 속의 한 장소가 떠올랐는데, 도무지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자고 결심했더니 코끼리만 생각하게 된 꼴이다. 도리 없이 ‘그곳’에 대해서 쓰기로 한다. 그래, 나의 ‘소울 시티’는 무진이다.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1964)의 배경인, 아니 그 소설의 주인공인 그곳. 그곳으로 가기 전에 먼저 두 단락 분량의 짐을 꾸려야 한다.

국문학과나 문예창작학과의 수업 중에는 ‘현대’라는 글자가 붙는 것이 많다. 현대소설론, 현대시인론, 현대비평론 등등. 그래서 처음 한두 주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큰 이야기를 하게 된다. 현대(modern)는 어떤 시대인가, 현대를 현대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현대문학은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터전이자 적수인 현대성과 대결해왔는가, 운운. 누군가에게 진정한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그가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것 말고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것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했던가. 현대문학이 현대성과 싸우는 방법도 그렇다. 현대는 밝힘(enlightenment, 계몽)의 시대다. 이성과 진보에 대한 당당하고 명료한 확신. 그렇다면 현대문학은 당당하고 명료한 것을 우울하고 애매하게 만들어버리는 길을 택해야 할 때도 있으리라.

우울하고 애매하게 만들기. 이를 각각 ‘멜랑콜리’와 ‘아이러니’라고 부른다. 잃어버린 것을 포기하지 못한 채 상실의 고통과 한 몸이기를 끝내 고집하는 것. 믿는 척하면서 안 믿고, 지는 척하면서 이기는 것. 전자는 우리가 무언가 결정적인 것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음을 고독하게 증거하고, 후자는 절대적인 진리라 간주되는 것들이 한낱 상대적인 진리일 뿐임을 경쾌하게 폭로한다. 멜랑콜리는 ‘증상’이고 아이러니는 ‘태도’이지만 여하튼 둘 다 ‘방법’이다. 현대문학, 즉 우울함을 퍼뜨리고 애매함을 창조하는 어떤 방법. (물론 멜랑콜리와 아이러니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문헌에도 나오지만, 현대라는 적수를 만난 1800년대 초반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그 가치가 재발견되었으니, 그런 의미에서는 ‘현대적’이다.)

이제 무진으로 가자. 우울함과 애매함이 지배하는 곳. “무진의 명산물”인 안개가 거기에 있다. “밤사이에 진군해온 적군들” 혹은 “여귀가 뿜어 내놓은 입김” 같은 안개 속에서 당당하고 명료한 것들은 힘을 잃는다. 그곳에서는 내가 지금 가진 것이 내가 잃은 것과 다르지 않음을 쓸쓸하게 인정하게 된다. 또 그곳에서는 성공과 실패, 진심과 거짓, 욕정과 사랑의 경계가 뒤섞인다. 그러나 안개 속에서만 보이는 이것이 우리의 진실이라면? 진실이란 본래 그렇게 우울하고 애매한 것이라면? 빨려들듯 찾아갔다 도망치듯 떠나오는, 진실의, 공간. 무진은 우리에게 왜 문학이 필요한지를 알려주기 위해 거기 있다. 우울하게 애매하게. 무진은 주인공 윤희중의 고향이자 현대문학의 고향이며 나의 고향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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