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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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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턴해야 닿을 수 있는 곳

여행가 노동효의 ‘오래된 홍대 앞,
제주도 문화 이민자의 미래’ 타이의 빠이
등록 2013-07-24 12:45 수정 2020-05-03 04:27

인간이 사는 곳은 딱 둘로 나뉜다고 생각했다, 도시와 시골. 내게 도시는 ‘신나는, 지옥(地獄)’이었고, 시골은 ‘심심한, 천국(天國)’이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나 아르튀르 랭보가 요절한 나이가 될 때까지 나는 더 크고 화려한 도시를 찾아다녔다. 프라하, 바르샤바, 베니스, 로마, 부다페스트, 런던…. 그러다 서른예닐곱이 넘었다. 그 무렵부터 작고 한적한 시골이 편해졌다. 그러나 기호나 취향의 변화가 있었을 뿐, 나의 지구는 여전히 도시와 시골로 나뉘어 있었다, 타이 빠이(Pai)에 가기 전까지.

타이 치앙마이에서 762개의 굽이를 지나면 ‘유토빠이’ 빠이에 도착할 수 있다.노동효 제공

타이 치앙마이에서 762개의 굽이를 지나면 ‘유토빠이’ 빠이에 도착할 수 있다.노동효 제공

타이 북부 최대 도시 치앙마이에서 올라탄 버스가 762개의 굽이를 지나 산들로 둘러싸인 빠이에 닿았다. 강원도 정선이나 경북 봉화 산골 오지 한가운데 1990년대 홍대 거리가 들어와 있는 듯했다. 소박하지만 예쁜 레스토랑들, 유명하진 않지만 독특한 예술작품들, 격렬하진 않지만 흥겨운 라이브 카페들. 20세기 말 홍대 앞의 순수·예술·음악·유랑의 정서가 숲과 폭포, 온천과 강, 논과 딸기밭으로 둘러싸인 마을 가운데를 흐르고 있었다. 도시와 시골이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지 않고, 밥과 나물이 잘 섞인 비빔밥처럼 융합될 수도 있구나! 빠이는 내게 ‘오래된’ 홍대 앞이자, 제주도 문화이민자들의 ‘미래’였다.

20여 년 전 빠이강이 흐르는 강변, 고산 부족들이 내려와 물물교환을 하던 마을에 히피 성향의 여행자들이 불시착했다. 여행자를 위한 숙소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도시로 돌아가 다른 여행자들에게 천국과 같은 장소를 발견했다고 알렸다. 알음알음으로 하나둘 빠이로 모여들었다. 마을에 게스트하우스가 생기고, 술집이 늘어나고, 재산권 분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거대자본이 손을 대고, 다국적기업의 패스트푸드점과 커피숍이 우후죽순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빠이는 달랐다. 도시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이주해온 지식인들과 원주민들이 나섰다. 빠이의 공동체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 타운플랜을 만들자!

그 뒤 호텔과 리조트는 마을에서 떨어진 외곽에 짓게 되었고, 밤 10시면 가게들은 문을 닫았다. 마을은 평온을 되찾았다. 사람들은 3R(재활용(Recycling)·재사용(Reuse)·감량화(Reduce))를 기반으로 한 아이디어 상품을 만들어 팔았고, 빠이는 자연친화적이고 슬로라이프를 추구하는 마을로 이름이 더 높아졌다. 타이인들은 빠이를 자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꼽기 시작했다.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치앙마이에서 빠이까지 762개 굽이를 직선으로 관통하는 터널을 뚫자! 토건업자들이 등장한 것이다. 땅값이 오르고 현대 기술문명의 혜택을 맘껏 누리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거부했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자연을 훼손하고 생명을 죽일 수는 없다’며 타이 국왕도 힘을 보탰다. 토건업자들의 목소리는 묻혔다.

‘더 빠르게, 더 높이, 더 강하게’ 경쟁하며 달려가는 우리가 유턴해야 닿을 수 있는 곳.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UTOPIA)에서 I와 A의 순서를 바꿔 유토빠이(UTOPAI)로 불리는 빠이도 결국 여느 관광지처럼 변할 것이라며 비관하는 이도 있고, 지난 20년처럼 조금 변하겠지만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며 낙관하는 이도 있다. 만물은 변한다. 내 영혼의 장소란 첫사랑과 같은 것. 세월의 풍상을 겪는 사이 주름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나는 바란다. 먼 훗날 다시 만나 이런 말을 건넬 수 있길. “아주 곱게 늙었구나. 여전히 아름다워.”

노동효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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