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가 싶더니 그새 5월 중순. 오대산 계곡 옆구리에 난 흙길을 천천히 걷는다. 물안개를 흠뻑 머금은 계곡에는 계곡물이 텀벙텀벙 흐르고, 산자락에선 물안개가 모락모락 피어난다. 너무 고요하고 신비로워 무릉도원에라도 들어온 것 같다. 강원도 산속답게 여긴 이제야 봄이 한창이다. 사향제비나비는 따사로운 햇볕을 희롱하며 훨훨 날아다니고, 보랏빛 제비꽃은 다소곳이 피어 수줍게 웃고, 야리야리한 연초록빛 나뭇잎은 서로 얽히고설켜 나무터널을 만든다. 그 틈바구니에서 색소폰 닮은 등칡꽃들이 줄기에 주렁주렁 매달린 채 반갑게 인사한다. 나뭇잎이 봄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땅바닥의 나뭇잎 그림자도 덩달아 살랑살랑 춤을 춘다. 순간 머릿속은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계곡물처럼 맑아진다. 이쯤이면 호강도 보통 호강이 아니다. 날마다 쫓기는 일상생활에서 도망친 것도 모자라 혼탁한 내 영혼을 거울처럼 맑게 씻어버리기까지 하다니!
뭐니뭐니 해도 ‘진부’ 하면 오대산, ‘오대산’ 하면 천년 고찰 월정사, ‘월정사’ 하면 전나무 숲길이다. 한아름, 아니 두 아름도 훨씬 넘는 전나무들이 쭉쭉 늘어서서 장엄하고 호젓한 전나무 숲길을 만들어낸다.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맑으면 맑은 대로 멋스럽고 운치가 있다. 보드라운 흙길을 한 걸음 한 걸음 딛노라면 전나무가 뿜어내는 특유한 향내가 코끝을 간질인다. 그 향은 전나무가 곤충 같은 초식동물이 자신을 먹지 못하게 만든 방어물질(피톤치드)인데, 되레 그 향이 우리네 사람들의 머릿속을 맑게 해주니 아이러니가 따로 없다. 전나무 숲길은 달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걸어야 제격이다. 겹친 잎사귀 틈 사이로 새어나온 은은한 달빛에 목욕하며 걷는 맛이란 세상 그 어느 것도 부럽지 않다. 운 좋아 추석 보름달 빛을 받으며 걷기라도 하면 그저 속세의 일들은 까맣게 지워져 머릿속이 하얀 도화지가 되어버린다.
지난여름, 오대산의 정기 가득한 안개자니계곡(평창군 진부면 병내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산골동네라 밤이 빨리 온다. 해 넘어간 서쪽 하늘은 그새 노을로 물들어 발갛더니 이내 어둠이 서둘러 땅에 내려온다. 그 흔한 가로등도 하나 없고 인적이 끊기니 숲 속 동네는 고요하기만 하다.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 풀벌레 노랫소리, ‘솥 적다 솥 적다’ 애절하게 울어대는 소쩍새 소리가 숲 속의 고요함을 깰 뿐이다. 서쪽 하늘에선 눈썹보다 더 예쁜 초승달이 또렷이 빛난다. 이어 하나 둘 셋… 하늘에 별들이 꿈꾸듯 떠오른다. 밤하늘은 순식간에 별바다가 되어 출렁이고, 어느새 내 머리 위에도 떡가루 같은 하얀 별빛이 마구 쏟아진다.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다 땅을 내려다본다. 아, 이게 웬일인가! 풀잎에서도, 나뭇잎 위에서도 ‘별빛’이 반짝반짝… 별이 한두 개가 아니다. 수십 개 되는 그 별은 다름 아닌 늦반딧불이다. 여기서도 반짝, 저기서도 반짝. 수많은 반딧불이가 풀과 나무 사이를 반짝거리며 날아다닌다. 살포시 불춤 추며 날아다니는 그 ‘별’을 따라다니다 보면 어느새 내 옷은 밤이슬로 흠뻑 젖는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툭하면 이곳을 찾는다. 마음이 뒤죽박죽일 때, 소박한 초심을 잃을 때, 뭔가 중요한 선택을 할 때, 몸과 맘이 지칠 때 등등. 병풍처럼 늘어선 산봉우리들의 넉넉한 품에 잠시라도 머무른 것 자체가 내겐 축복이다. 더구나 어여쁜 곤충과 데이트하는 재미도 쏠쏠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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