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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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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에서 태어나 평창동에 산다

그림 같은 대관령은 본 적 없는 소심한 ‘우리 평창’과 부잣집 사이 서민 빌라에서 매일의 안식을 얻는 ‘평창동’
등록 2013-08-21 13:49 수정 2020-05-03 04:27

나는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산다. 평창에서 나서 평창에 산다. 이렇게 쓰고 보니 평창이야말로 마이, 소울, 시티인 것처럼 느껴진다.
먼저 강원도 평창 이야기를 해보겠다. 군 단위는 엄청 넓어서 내가 아는 평창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스키장 많은 용평이나 그림 같은 목장이 있다는 대관령은 가본 적이 없다. 그 평창은 ‘우리 평창’이랑 참 많이 다르고 낯설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 면적이 605km², 평창군은 1464km²다. 몇 년 전까지 ‘우리 평창’은 외갓집이 있는 평창읍 다수리랑 4살 때까지 살았던 평창읍내였다.

평창동은 산 밑이라 교통이 불편하다. 하지만 산 밑이라 공기 좋고 경치 좋고 여름엔 시원하다.김송은 제공

평창동은 산 밑이라 교통이 불편하다. 하지만 산 밑이라 공기 좋고 경치 좋고 여름엔 시원하다.김송은 제공

차로 갈 땐 문막IC에서 내려 국도 따라 가는 길이 운치 있다. 길을 말로 설명할 순 없는데, 막상 가면 그냥 알아서 가고 있다. 대충 이정표를 보고 가면 맞는 것 같다. 치악산을 지나 구불구불 산길을 오를 땐 창문을 내리고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노래 같은 걸 들어주면 좋다. 뜨뜻한 바람을 맞으며 (Hey)의 스페인어 가사를 엉터리로 따라 부르면 이런 게 인생이지, 란 기분이 든다. 해발 600m쯤 이르면 드디어 귀가 콱 막히는데, 거기부터가 평창이다. 평창은 몸으로 압박하며 다가온다. 안흥을 지날 땐 안흥찐빵을 한 박스 사야 한다. 너도나도 원조집이라 간판에 쓰여 있는데, 사실 아무 집에서나 사도 다 맛있다.

버스로 갈 땐, 평창읍내 터미널에서 내리면 바로 시장이 있다. 시장에선 수수부꾸미랑 김칫소를 넣은 메밀전병, 배추 부침개를 먹어야 한다. 특별한 맛이 없다는 게 매력인데, 수수한 맛이 좋아 먹다보면 꽤 먹게 된다. 그게 평창 맛이다.

몇 년 새 ‘우리 평창’의 범위가 진부면까지 넓어졌다. 여기서 슬며시 자랑을 하자면 진부에 조그만 밭뙈기가 있다. (네, 저 땅 있는 여자예요.) 오빠 명의로 돼 있고, 팔아도 돈이 안 되지만 나에겐 노후를 대비하는 꿈의 밭이다. 나무 재벌을 꿈꾸며 지난해부터 묘목을 심고 있기 때문이다. 진부는 기온이 낮아서 나무를 심을 수 있는 시기는 5월 한 달뿐이다. 지난해에 자작나무·마가목·산사·소나무를 합쳐 50주가량 심었고, 올해엔 주목·앵두·불두화 등을 50주 정도 심었다. 나무 심으러 갈 땐 삽자루를 챙겨가야 하니까 차로 간다. 진부IC에서 내리면 바로 진부농원이 있는데, 농원에 들러 사장님의 조언을 듣고 묘목을 산다. 50주 정도 사봐야 15만원이 될까 말까다. 하룻저녁 술값이면 나무가 50그루!

한나절 나무를 심고, 밭에서 고기도 구워 먹으면 해 질 무렵이 된다. 장비를 챙겨 주문진으로 넘어간다. 30분 남짓이다. 영진해변에서 저녁을 먹고 아무 민박집에서나 잔다. 저녁에 술을 많이 마셨어도 아침 9시엔 일어나야 한다. 1세대 바리스타 박이추 선생이 운영하는 보헤미안 카페의 모닝세트를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도톰한 토스트와 삶은 달걀, 크로켓의 특이한 구성이다. 여기에 보헤미안 블렌드 커피.

평창동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벌써 원고 분량을 다 채웠다. 급히 마무리하자면, 평창동에 산다고 하면 우와, 부자인가 봐요 하는데, 이때 애매하게 웃으면 진짜 부자처럼 보일 수 있다. 행색이 초라한 건 성격이 소탈해서인 걸로. 4년째 살고 있는 이 동네의 매력은 뭐가 특별한 게 없다는 거다. 산 밑이라 공기 좋고 경치 좋고,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춥다. 술집도 하나 고기집도 하나 분식집도 하나 카페 두어 개 슈퍼마켓 서너 개. 뭘 선택해야 손해를 덜 볼지 고민 안 해도 되는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렇게 마이 소울은 별 거 없는 평창에서 매일의 안식을 얻는다.

김송은 씨네21북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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