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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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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를 살리는 살림집 지어요

상수역 제비다방, 북촌 부부건축, 성남 태평동락 커뮤니티, 성미산 소행주… ‘동네’를 아는 만만한 건축가가 짓는 살림의 집, 소통의 주택, 축제하는 마을
등록 2012-06-13 21:55 수정 2020-05-03 04:26
건축의 엄숙주의를 벗고 소박하고 즐거운 공간을 구상하는 건축가들이 있다. 건축가 오상훈씨가 서울 상수동에 만든 제비다방 지하 공연장.

건축의 엄숙주의를 벗고 소박하고 즐거운 공간을 구상하는 건축가들이 있다. 건축가 오상훈씨가 서울 상수동에 만든 제비다방 지하 공연장.

“한국의 건축가들은 주택 문제에 흥미를 상실했다.” 10여 년 전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이렇게 썼다. “대단지 아파트는 서울을 오래 지속될 수 없는 하루살이 도시로 만들고 있다”고도 했다. 아파트 건설사와 정부가 벌이는 게임 속에서 주택에 관심 없기는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휘황한 시 청사와 장대한 아파트 단지의 꿈이 사그라들며 발길이 동네로 향한다. 건축가 황두진은 ‘동네 건축가’를 자처하며 “우리 동네에서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내가 살아가는 공간적 현실을 살피는 것이 의미 있는 출발이 되리라는 지적이다. 우리 단지가 아닌 우리 동네에서 오래오래 살 곳을 마련할 수 있을까? 동네에 터 잡고 집 짓는 젊은 건축가들이 있다.

우리 동네 다방 주인은 건축가

서울 상수역에서 홍익대 쪽이 아닌 강변북로 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작은 다방이 눈에 들어온다. 저녁때면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차는 ‘제비다방’이다. 사실, 이곳이 늘 붐비는 이유는 작기 때문이다. 워낙에 44.5㎡(13.5평) 남짓한 좁은 공간인데 바닥의 절반 가까이 구멍을 뚫고 나니 10명만 들어서도 꽉 차는 느낌이다. 지하 공연을 내려다보려고 바닥을 들어냈단다. 난간 같은 바에 기대 위층 손님들은 아래층 공연을 보며 술을 마신다. 연주자의 머리 꼭대기를 내려다보며 음악을 듣는 이 기발한 공간을 만든 사람은 건축가 오상훈씨다. 영국 런던의 건축학교 에이에이스쿨을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온 오씨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다방 주인이 된 것이었다. “유학 시절부터 작가인 친구 이승헌, 디자이너인 동생 오창훈과 함께 문화지형연구소 ‘씨티알’이라는 회사를 차렸어요. 씨티알에서 독립잡지 도 내고, 독립예술가들의 아지트 ‘레몬살롱’도 운영했지요. 독립잡지건 독립공간이건 홍대 앞에서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둘러 귀국했지요. 제비다방은 ‘지속 가능한 놀이터’를 위한 여러 장르의 합작품이에요.” 다방 2·3층에는 그들의 건축·디자인·잡지 사무실이 있다. ‘제비다방’이란 이름부터가 시인 이상이 차린 술집 이름에서 빌려왔다. 시인 이상처럼 다른 장르 예술가들과 자주 노닐면 새로운 것이 나오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척도와 질서의 엄중한 세계에 갇히는 대신 택한 독립예술가들의 교류가 가져다준 새로운 것은 무엇일까? 지하 공연장은 인디밴드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좁기는 마찬가지지만 알전구 수십 개로 무대를 장식하고, 무대 뒤편엔 손바닥만 한 녹음실도 있다. “1층과 지하 사이에 뚫린 구멍이 울림통 역할을 해서 소리가 위로 퍼져요. 1층은 모던한 공간으로 꾸며 회사원들이 정장 입고 앉아 술을 마시는 곳, 지하층은 옛날 소극장 같은 분위기를 내서 음악가들이 맘대로 즉석 공연을 하는 곳이에요. 지하 천장과 1층 바닥을 터버리며 위아래층 손님들이 서로 엿보는 것을 상상했어요.” 좁은 공간이지만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밴드들의 공연이 끊이지 않는다. 6월13일에는 ‘하찌와 애리’가, 6월15일에는 ‘크라잉넛’이 온다. “동네 주민들이 들어올 자리가 없을까봐 공연 홍보도 하지 않아요. 슬리퍼만 신고 나가도 집 앞에서 좋아하는 밴드를 볼 수 있는 동네 놀이터가 되면 했어요.”

제비다방은 독립예술가들의 놀이터가 아니라 동네 놀이터를 꿈꾸는 곳이다. 이곳은 원래 25년 전에 지어진 낡은 사무실 건물이었다. 외관을 말쑥하게 단장하는 대신 허름한 세월을 간직하는 쪽을 택했다. 노점상들을 막으려고 둘러쳤던 철근 구조물을 걷어내고, 야외 테라스에는 널찍한 평상을 두었다. 아무 때나 동네 주민들이 걸터앉아 쉬어간다. 오씨는 주민과 동네 예술가가 한데 섞이는 공간을 구축하는 문화기획자 노릇을 하는 새로운 유형의 건축가일지 모른다.

서울시는 지난 3월 마을 만들기 계획을 발표했다. 마을 모델로 떠오른 성미산 공동주택 ‘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 1호.

서울시는 지난 3월 마을 만들기 계획을 발표했다. 마을 모델로 떠오른 성미산 공동주택 ‘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 1호.

명품 건축 대신 ‘보통의 건축’

건축가는 많아도 우리 집에 필요한 소소한 일을 해주는 만만한 건축가는 없다고들 한다. 턴키(Turn-key·건설회사가 설계부터 시공까지 한 번에 수주받는 방식) 방식으로 대형 건축물을 짓는 시대에는 사람들이 좀처럼 건축가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얼마 전부터 살림집에 대한 관심이 돌아왔다. 건축가의 진정한 경쟁 상대는 집장사다. 몇몇 건축가들은 설계·감리 비용을 공개하며 속을 털어놓았다. 알고 보면 집장사만큼이나 만만한 건축가에게 집을 맡기라고 권유한다. 구청 앞에 줄지은 설계사무실, 일명 ‘허가방’이 찍어내는 천편일률적인 집 모양새에서 벗어나보자고도 한다. 이제는 사람들의 생각을 들을 차례다.

서울 북촌에 ‘동네 건축가’를 자처하며 터 잡은 건축가 신호섭·신경미씨는 사무실을 열자마자 동네 사람들과 건축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소식지로 냈다. 프랑스 마른라발레 건축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이들 부부는 ‘건축’이라고 쓰고 ‘부동산’이라고 읽는 사회에서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대저택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일상적인 공간을 구현하는 ‘보통의 건축’을 하고 싶던 그들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소식지 는 지금까지 4호를 내며 북촌 사람 20여 명을 만났다. “의외로 동네 사람들이 좋은 공간에 대한 욕구가 상당하고 좋은 건축의 근본을 알고 있어요. ‘바람 잘 통하고 햇빛이 잘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그러시더라고요. 지금까지 건축가들이 그렇지 못한 집을 지었다는 거잖아요. 특권층을 위해서만 일한다는 기성 건축가들에 대한 불신도 느꼈어요.” 신경미씨가 전하는 프랑스 상황도 우리와 비슷하다. “거기서도 건축가의 이미지는 비슷해요. 특권층을 위해 일하는 사람, 지식인, 좌파, 잘난 척하는 사람들. 라는 책도 있었어요, 하하. 개인주택은 대부분 집장사가 지었죠. 그러다 2000년대 초반 공공·대형 건설의 시대가 저물며 젊은 건축가들 중심으로 살림집 짓기 운동이 퍼졌어요. ‘일상의 건축’이라는 말이 화두로 떠올랐죠.”

동네의 작은 화분, 대문들을 찍고 소식지에 담으며 일상을 재건축하기 시작한 이들 부부에게 우선 들어온 것도 동네 일감들이다. 요즘은 서울 종로의 오래된 찻집을 손보며 천천히 뻗어나가는 중이다. “건축가의 본분이 무엇인지 고민해요. 건축물도 다양하고 건축가도 다양하면 좋겠어요. 대형 건축가도 분명 있어야 하고, 동네 건축가는 정말 필요한데 없었던 거잖아요. 그렇다고 동네 건축가가 평범한 집을 짓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상적인 순간을 특별하게 빛내주는 만만한 건축가가 되고 싶어요.”(신호섭)

건축가 신호섭·신경미씨는 설계사무소를 열자마자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좋은 건축을 묻고 그 이야기를 소식지로 냈다. <동네 사람들, 건축을 말하다>라는 소식지다.

건축가 신호섭·신경미씨는 설계사무소를 열자마자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좋은 건축을 묻고 그 이야기를 소식지로 냈다. <동네 사람들, 건축을 말하다>라는 소식지다.

욕심을 덜어내고 이웃을 얻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우리 동네라고 할까? 건축가 김진애씨는 반경 500m 정도를 잡는다. 손에 잡히고 그림이 그려지는 크기가 딱 그만하다. 서울 인사동은 남북으로 600m에 동서로 400m 남짓하단다. 스펙터클은 없어도 일상이 있는 곳, 무엇보다 이웃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이 동네다. 김진애씨는 에서 “도시에서 작은 기쁨을 만드는 비법은 ‘동네’에서 나온다”고 했다. 20년 넘게 집을 지어온 대안건축연구소 류현수 소장도 “집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이웃과의 소통에 달려 있다”고 결론짓는다. 생태 건축, 저렴한 건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살이라는 깨달음이다. 유명한 건축가와 잘 짓기도 하고 거품을 없앤 싼 집도 지어봤지만 결국 “소통이 건물 뼈대만큼 중요하다고 느낀” 류 소장은, 지난해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서 성미산 주민들과 공동체형 주택인 ‘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소행주)을 지었다. 주민들이 협동조합 방식으로 짓고 대안건축연구소가 시공사를 맡았다(889호 레드 기획 ‘작은 집이 좋다’ 참조). 두 번째 ‘소행주’ 주택도 오는 7월이면 완공될 것이다.

서울 마포 성미산마을의 ‘소행주1호’. 대한건축연구소 제공

서울 마포 성미산마을의 ‘소행주1호’. 대한건축연구소 제공

“정당 활동보다 어려운 게 주거 문제”라는 류현수 소장의 말처럼 공동주택을 보면 한국 사회의 문제가 읽힌다. 해법도 그 안에 있다. 대안건축연구소가 시공사를 맡아 경기도 성남에 짓고 있는 ‘태평동락 커뮤니티’는 주상복합형 공동체 주택이다. 39년 동안 도심 개발에서 밀려난 이주민들과 이주노동자가 깃드는 쉼터 노릇을 해온 교회를 헐고 도심형 주민공동체 주택을 새로 짓고 있다. “집 지을 때는 먼저 그 땅의 의미와 역사를 읽어야 해요. 성미산에 공동주택이 들어설 이유가 있었다면 성남은 성남대로의 이유가 있지요. 보통 설계대로라면 원룸 100가구를 지을 수 있는 넓이예요. 그런데 78가구만 지어요. 주민교회가 지역주민들을 위해 양보한 거지요.” 류현수 소장의 설명이다. ‘태평동락 커뮤니티’는 지하 2층 지상 12층 규모로 지어진다. 이 중 4층에서 8층까지가 원룸 주택이고, 3층에는 지역재단과 협동조합들이 들어선다. 교회는 지하 1층과 2층으로 내려갔다. 교회는 일주일에 1~2번 예배를 드릴 때만 필요하다며 다른 날에는 동네 사람들을 위한 마을극장이 된다. 교회가 건물 욕심을 버리고 지역과 주민들과 공동 살림을 하는 것이다. 교회 공간 한쪽에는 빈민 선교를 해온 이해학 목사의 주도로 지역 역사관이 차려진다. 옥상도 잔치할 공간 하나 없던 동네 사람들의 놀이터가 될 것이다.

소행주2호. 대한건축연구소 제공

소행주2호. 대한건축연구소 제공

주인이 양보하지만 결국은 손해가 아니다

‘소행주 2호’ 주택에는 시민단체와 마을에서 일꾼 노릇을 해온 활동가들의 삶의 터전이 차려진다. ‘독립생활자 자구조합’이라 불리는 이 집엔 활동가 5명이 한집에 모여 살도록 설계됐다. 소행주는 경희대 생활협동조합과 손잡고 ‘공동체형 하숙집’도 추진 중이다. 소행주가 건물의 보수·관리를 맡고, 생협이 유기농 식단을 댄다. 대신 방값을 쉽게 올리고 쉽게 내쫓는 하숙집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집주인의 손해가 아니에요. 대학가에서 원룸을 지으면 당장은 세입자가 많아질지 모르지만 관리비와 경쟁을 생각하면 결국 남는 게 없어요. 학생들은 학기마다 철새처럼 떠나요. 원룸 하나 더 지을 돈으로 집 같은 하숙집을 만드는 거죠.” 어디서건 공용 공간은 필수다. “동네를 생각하고 집을 지으면 집주인이 양보해야 해요. 소행주 주택에서는 집집마다 1평(3.3㎡) 값을 내서 공용 공간을 만들었죠.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삶의 질이 높아졌어요.” 우리 동네로 열렸던 눈은 이웃을 만나 다정해진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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