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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을 벗어난 ‘을’들만의 공간

창작이 움트는 공간 작업실…방 19개짜리 집이 아니더라도 작은 판자만 있으면 된다네
등록 2012-05-30 20:08 수정 2020-05-03 04:26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공동작업실 ‘레인보우큐브’. 커튼으로 벽을 세워 공간을 나눴다. 큰 캔버스를 쓰거나 설치미술을 하지 않는다면, 여러 작가가 그 안에서 또 공간을 나눠쓰기도 한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공동작업실 ‘레인보우큐브’. 커튼으로 벽을 세워 공간을 나눴다. 큰 캔버스를 쓰거나 설치미술을 하지 않는다면, 여러 작가가 그 안에서 또 공간을 나눠쓰기도 한다.

(씨네21북스·2010)을 펴낸 일본의 작가 세노 갓파는 타인의 공간을 들여다보기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다양한 분야 사람들의 작업실을 들여다보면 분명 그 너머에 보이는 게 있을 거예요. …무언가 ‘지금 이 순간’이 보일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예컨대 이런 것일까. 마크 트웨인은 1874년 미국 코네티컷 하트퍼드에 집을 지었다. 방 19개짜리 집은 생활 공간이자 영감의 원천인 거대한 작업실이었다. 1층은 손님 응대와 식사, 2층은 가족, 3층은 오로지 트웨인 자신을 위한 공간으로 꾸몄다. 매일 아침 그가 당구를 치던 공간을 비롯해 상상력을 촉진하거나 긴장을 풀어줄 물건으로 방을 가득 채웠다. 1891년 마크 트웨인은 재정적 어려움으로 이 집을 떠났지만 지금도 그곳엔 그의 작품 세계뿐만 아니라 그가 ‘잘나가던 시절’ 그 순간 또한 깃들어 있다.

그러나 호화로워야만 창작의 기운이 샘솟는 것은 아니다. 거장만이 ‘자기만의 방’을 소유하란 법도 없다. 누구나, 설령 특별히 해야 할 것이 없더라도 우리는 오롯이 ‘지금 이 순간’을 기록할 자기만의 공간을 꿈꾼다. 이 시대, 창작이 움트는 공간으로서의 작업실을 들여다봤다.

작업실을 나누는 공간은 얇은 천

작업실 커뮤니티 ‘레인보우큐브’는 최근 서울 당인동 제일J1 갤러리에서 ‘작업:실展’을 열었다. 서울 마포구 일대에서 작업실을 얻어 활동하는 화가, 설치예술가,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을 공모했다. 주최 쪽은 “작가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은 대학 졸업생의 첫 번째 선택은 어떤 작품도 전시도 아닌, 다름 아닌 작업실”이라는 점을 주목했다. 레인보유큐브 대표 김성근(29)씨는 작가가 아닌 제3자의 눈으로 작업실 작가들의 활동을 흥미롭게 지켜본다.

미술 관련 도구 판매업을 하는 김 대표는 미술 전공자들과 교류하며 자연스레 공동작업실을 얻었다. 레인보우큐브는 2011년 8월,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서 사무실로 나온 오래된 건물 2층에 둥지를 틀었다. 작가들은 보증금 23만원에 월세 23만원을 내고 작업 공간을 가진다. 이들은 옥탑방까지 포함해 약 60평의 공간을 나눠쓴다. 김씨는 작가들이 내는 월세를 모아 전체 세와 공과금을 내고 비품을 마련한다. 운영을 한다지만 이 일로 딱히 수익이 나는 것은 아니다. 그 또한 책상 놓을 조그만 공간을 얻었을 뿐이다.

레인보우큐브를 비롯해 망원동 일대에서 작업하는 작가들은 20대 후반~30대 초반이다. 공동작업실은 사회라는 정글에 갓 진출한 예술가들을 품는 공간이다. 레인보우큐브 원년 멤버라는 전영진(29) 작가는 “경제적인 이유가 공동작업실을 선택하는 첫 번째 이유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미술을 하는 경우 학교에서 작업실을 사용했던 것이 익숙하다. 공동작업실은 그 형태가 학교 밖으로 자연스레 이어진 모습”이라고 한다.

작업 공간은 천을 이어붙여 만든 커튼으로 자기와 타인 사이를 구분짓고 있었다. 얇은 천의 벽은 그다지 공고하지 않았다. 그 사이로 옆사람이 듣는 음악과 무의식 중에 흘리는 콧노래도 비어져나온다. 그러나 이 공간에서는, 함께 있다는 것이 누군가로부터 방해받는 것만 의미하진 않는다. 전영진 작가는 공동작업실의 장점으로 “다른 사람의 작업을 보고 자극받거나 배우는 점이 많다. 공모전, 행사 정보 등을 교환하기도 하고 일에 도움을 주고받을 사람을 만날 기회도 생긴다”고 한다. 혼자만의 작업을 하지만 결코 혼자가 아닌 공간에서 작가들은 서로에게 필요한 가치를 교환하고 있었다.

시대가 양산한 프리랜서 전문직 종사자들에게도 집중할 공간은 필요하다. ‘갑’의 사무실보다 마음 편히, 카페보다 안정적으로 노트북 두드리며 일할 공간은 없을까. 서울 홍익대 인근 작업실 ‘물고기’와 ‘미로’는 다양한 꿈을 꾸는 이들로 조밀한 공간이다. 작업실을 운영하는 임혜영씨는 영화 연출과 시나리오작가 일을 한 지 13년째다. 오래 영화판에 몸담았지만 생활이 녹록지 않았다. 임씨는 “굶지 않고 작업을 해나가야겠다는 생각에 공동작업실을 마련했다”고 밝힌다. 순수미술가, 일러스트레이터, 만화가, 동화작가, 시나리오작가, 소설가, 다큐 감독, 사진작가 등이 공간을 나눠쓴다. 임씨는 “작가들이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서로 소통하는 공간을 원한다”고 한다. 작가들은 이곳에서 서로 채찍질하고, 칭찬하고, ‘갑’의 전횡에 고단한 친구를 위로해줄 동료를 얻는다. 한발 더 나아가 임씨는 작가들에게 작업한 작품을 벽에 걸어놓기를 적극 권장한다. 다른 영역의 창작물을 보며 새로운 자극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18세기 프랑스 귀족 부인들이 자기 집 거실에서 작품을 낭독하고 서로 비평할 수 있는 자리를 열어줬다면, 21세기 예술가들은 스스로 그런 장을 마련하고 있는 셈이다.

오류, 간섭, 잡음 등을 벗 삼아

개인적인 공간을 쓰며 뜻밖의 동료를 얻은 이도 있다. ‘장기하와 얼굴들’ ‘브로콜리 너마저’ 등의 앨범 작업을 맡아온 디자이너 김기조(28)씨는 2011년 서울 쌍문동에 ‘기조측면’이라는 이름의 원맨 스튜디오를 열었다. 말이 좋아 원맨 스튜디오지 거창한 공간은 아니다. 30년 된 건물 1층, 한 10년쯤 전에는 구멍가게였을 법한 방 하나 딸린 상점 자리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25만원, 공과금은 무료다. 바로 옆에서 부동산을 하는 마음 좋은 주인 할머니가 젊은이 혼자 전기며 수도를 얼마나 쓰겠느냐며 그냥 지내라고 했단다.

혼자 있는 공간, 지켜보는 이 없으니 나태함을 느끼는 순간도 있다. 그러나 김씨는 이내 새로운 자극을 찾았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오래된 동네, 길가를 마주한 문틈으로 공사 소음, 지나가는 사람들의 잡담, 싸움 소리가 작업실에 고스란히 수용된다. 여름에 문을 열어놓으면 “여기 뭐하는 곳이오?” 하고 들여다보는 이도 적지 않다. 처음엔 작업에 방해가 됐지만 어느 순간 익숙해졌다. 오류, 간섭, 잡음 등을 동료 삼으니 작업하는 데도 오히려 너그러워졌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실이 자리잡은 공간에 대해 “외부 자극과 차단돼 특유의 결벽성을 보이는 일반적인 디자인 스튜디오와 이곳은 다르다. 낡고 오래되고 나이 들어 보이는 동네인데, 생각보다 액티브하다. 예컨대 재활용 쓰레기를 내놓으면 순식간에 사라진다. 뭔가 끊임없이 교환이 이뤄지는 거리다”라고 했다. 기조측면의 인테리어는 8할을 거리에 기댔다. 대부분 어디서 주워온 것이거나 중고 물품이다. 공간의 주인은 대충 오래된 것처럼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성실히 낡아가는 물건들에 매력을 느낀단다. 주워온 가구, 오래된 동네에 자리잡은 작업실, 컴퓨터가 따라잡을 수 없는 손맛을 강조하는 디자이너는 하나의 맥락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공동작업실을 사용하는 전영진씨와 개인 작업실을 쓰는 김기조씨가 입을 모아 말한 것은, 작업에 집중하려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 작업실에서 생활감을 지우는 것이란 점이다. 그러나 이들처럼 전문적으로 자기 영역에 몰두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려고 따로 작업실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다. 최근 (오브제·2012)을 펴낸 영국의 저널리스트 캐럴라인 클리프턴 모그는 작업실을 이렇게 정의했다. “방 주인의 취향과 활동을 알 수 있는 공간,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 원하는 것으로 가득한 자기만의 공간, 차분하면서도 창의적인 안식처인 동시에 피난처.” 말인즉 작업실 마련은 집에서도 가능하다는 것.

정길영씨가 거실에서 옷과 패턴을 만드는 공간. 용도만 명확히 설정한다면 거실 한쪽이라도 ‘창의적 안식처’인 작업실을 만들 수 있다.

정길영씨가 거실에서 옷과 패턴을 만드는 공간. 용도만 명확히 설정한다면 거실 한쪽이라도 ‘창의적 안식처’인 작업실을 만들 수 있다.

정길영(30)씨는 인터넷 홈페이지 ‘에이프릴 스토리’에서 자신이 디자인한 의류 패턴과 DIY 패키지를 판매한다. 온라인숍의 문은 한 달에 한 번 기간을 정해놓고 연다. 매일 일 더미에 치이지 않고 집에서 작업이 가능한 이유다. 정씨는 집 안의 작업실에 자리잡기까지 시행착오를 여러 번 거쳤다. 회사 생활을 접고 쉬던 중, 잡지를 보다가 리넨·면 등 직물의 자연스런 질감을 살린 옷을 보고 자신도 할 수 있겠다 싶어 옷 만들기를 시작했다. 이것이 일이 되면서 작업실을 따로 썼다. 결혼을 한 뒤 작업실을 11평 신혼집 거실로 옮겨왔다. 정씨는 “어디로 나가야 한다는 부담 없이 생활에서 작업이 바로 이어지는 것도 좋다”고 한다.

캐럴라인 클리프턴 모그는 공간의 용도를 설정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예컨대 그곳을 홈비즈니스 공간으로 꾸밀 것이냐, 가계부를 쓰는 등 사소한 작업을 하는 공간으로 할 것이냐, 재미는 있으나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취미생활을 위한 공간으로 할 것이냐 하는 고민을 해봐야 한다는 것. 그런 점에서 정씨의 작업실도 정체성이 확연하다. 거실 한켠의 공간은 누가 봐도 옷이며 패브릭 소품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탁자를 들고 그대로 밖으로

J. D. 매클라치가 (마음산책·2011)에서 엿본 거장의 작업실 또한 마크 트웨인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작지만 ‘용도’에 집중한 소박한 공간이었다. 의 루이자 메이 올컷은 둥글고 작은 판자를 벽에 고정해 그곳을 작업실 삼았고,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창문 앞에 보조 책상이라 할 만치 작은 책상을 놓고 글을 썼다. 윌리엄 포크너에게 작업실은 유동적이었는데, 그는 어머니가 준 낮은 탁자에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혀서 소설을 쓰다 이 탁자를 그대로 밖으로 들고 나가 글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그러니 ‘자기만의 방’은 어디에서든 가능했다. 언젠가 자신의 이름을 건 공간을 가지길 꿈꾸며 공간을 공유하는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실부터 자신의 취향을 철저하게 담은 개인 작업실, 집안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꾸민 현실적인 공간까지. 2012년의 작업실은 삶과 작품이 쌓이는, 사적이면서 동시에 공적인 공간이었다. 갖고 싶다면 작업실, 가능하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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