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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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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의 탄생, 인간의 혁명

인류가 음식을 조리해 먹기 시작한 순간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지어졌다…
리처드 랭엄의 〈요리 본능〉
등록 2011-10-27 18:15 수정 2020-05-03 04:26

한 인터넷 서점의 검색창에 ‘요리’라는 단어를 넣으니 모두 1만5921건의 국내외 서적 등이 검색됐다. 많은 수일까? 비교 삼아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하는 다른 단어들을 집어넣어봤다. ‘인권’ 682건, ‘자유’ 4382건, ‘평등’ 207건. 단순 비교할 수 있는 차원은 아니지만, 압도적 차이는 인간이 요리라는 영역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정도는 보여주지 않을까.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리처드 랭엄 교수는 인류 역사를 발전시킨 가장 위대한 도구는 ‘요리’였다고 말한다. Ricardo Liberato

리처드 랭엄 교수는 인류 역사를 발전시킨 가장 위대한 도구는 ‘요리’였다고 말한다. Ricardo Liberato

또 한 권, (사이언스북스)이라는 제목을 달고 검색어에 걸려들 책이 나왔다. 그러나 으레 요리책이 그렇듯 음식을 자르고 지지고 볶고 튀기는 방법과 순서를 알려주는 책일 것이라 기대한다면 틀렸다. 은 인간이 어떻게 음식이란 것을 지지고 볶게 되었는지, 인류가 요리에 대해 가졌던 태초의 관심까지 좇아가 요리 탄생의 시점을 추적하고 요리가 인류의 육체와 정신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두루 탐색한다.

인간이 지구상에서 지배적 존재로 자리하게 된 계기가 불을 발견하고 소유하게 된 사건에 있었다는 것에 토를 다는 학자는 없다. 그러나 저자 리처드 랭엄 교수(미국 하버드대학 인간진화생물학과)는 단순한 불의 소유가 아니라 불을 사용한 요리의 발견이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지난 수십 년간 지구상에서 인간과 가장 가까운 종인 침팬지의 먹이 행동과 생태를 관찰한 결과와 고고학·인류학적 증거들을 바탕으로, 인간이 불을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요리와 맛에 탐닉하는 순간 인류 진화의 역사도 격변했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연 상태 그대로는 생존 경쟁력이 떨어진다. 고양이처럼 자유자재로 날카로운 발톱을 숨겼다 드러낼 수도 없고, 호랑이나 코끼리처럼 육중하지도 않다.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영양처럼 재빠르지도, 뱀처럼 치명적 독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그럭저럭 살아남아 운 좋게 먹을 것을 구했다고 할 때, 인간은 또 한 번 난관에 부딪힐 것이다. 턱은 약하고 입은 작으며(다람쥐 등을 제외하고 인간만큼 얼굴에서 입이 차지하는 면적이 작은 동물은 흔치 않다) 이빨은 무뎌서 단단한 고기를 씹어먹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인간이 원래 육식을 하지 않는 채식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인류 역사에 불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인간은 생식주의자로 타고났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이에 랭엄 교수는 농경이 등장하기 훨씬 전의 인류는 먹을거리를 구하기 힘든 시기를 주기적으로 겪었을 것인데, 생존 경쟁력이 약한 인간이 그런 시기에 날것을 먹거나 채식만으로 생을 온전히 버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요리 등을 통한 저장 방법이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또한 엄격한 생식을 하는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 생식 식단은 익힌 음식보다 충분한 에너지를 공급하지 못하고, 여성에게서 생리가 완전히 중단되거나 주기가 불규칙해지는 경우가 발견됐고, 남성 또한 성기능이 저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종족 번식’이라는 중요한 기능의 저하는 인간이 태생적으로 생식하는 체질이라는 주장을 강하게 반박한다.

〈요리 본능〉

〈요리 본능〉

인간 진화 역사에서 언제 요리가 나타났는지를 찾기는 쉽지 않다. 불을 사용해 먹을거리를 조리했음을 입증하는 자료들이 소실됐기 때문이다. 불을 피운 흔적은 쉬이 사라지고, 채소와 과일을 태운 조각도 부산물조차 남기지 않고 썩어버렸거나 인간의 위에 의해 소화됐다. 고기를 익혀 먹을 때도 뼛속까지 익히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뼈 화석 등에서 화식(火食) 흔적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이런 이유로 학자들은 인간이 불을 이용해 요리하기 시작한 시점을 대략 4만 년 전 후기 구석기 시대로 잡기도 하고, 그보다 이른 20만~50만 년 전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랭엄 교수는 이스라엘 요르단강 부근에서 발견된 불에 탄 씨앗과 나무, 부싯돌을 근거로 약 79만 년 전부터 인류가 불을 사용해 요리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하빌리스에서 직립원인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인류 진화 역사 600만 년 중 치아가 가장 큰 폭으로 작아졌고 몸집이 가장 큰 폭으로 커졌다는 점을 들며 인간은 이미 200만 년 전에 불로 요리를 시작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기한다.

요리법과 인류의 공진화

음식을 불에 익히면 식물의 섬유질과 동물의 육질 모두 부드럽고 연해진다. 랭엄 교수는 인간이 음식을 불로 익혀 먹게 되자 씹는 데 걸렸던 시간, 그러니까 하루 4시간씩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더불어 소화로 인한 에너지 소모도 10%가량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여분의 시간으로 사냥 등 여러 활동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여분의 에너지로 인체 대사량의 20%에 달하는 뇌를 발달시키며 진화를 거듭했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언어나 도구의 사용, 짝짓기나 사회적 협력 등이 뇌발달의 원동력이었다고 말하지만, 랭엄 교수는 인간 진화의 계기는 ‘불로 요리하기’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세대를 거듭해 좀더 다양하고 복잡한 요리법을 개발하며 뇌를 자극하는 도구로서 요리를 사용했을 것이라 말한다. 실제로 고고학적 자료들은 지난 200만 년 동안 인류 진화 역사에서 뇌 크기가 지속적으로 증가해온 경향을 보여준다. 나아가 랭엄 교수는 인류의 조상들이 함께 사냥한 음식을 요리해 나눠 먹으며 사회성을 기르고, 사냥하는 자와 요리하는 자라는 성별 분업과 결혼이라는 제도까지 마련했을 것이라 주장한다. 모든 인류 역사의 이유에 요리가 근거로 작용한다고, 저자는 조목조목 설명한다. 김이 오르는 한 그릇의 요리 속에는 식재료뿐만 아니라, 수백만 년의 인류 진화 역사가 양념처럼 뭉근하게 녹아들어 있다는 것이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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