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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저녁 후배놈과 새벽까지 술 처먹고 들어갔다 잠긴 현관문 부여잡고 오열한 사람은 안다. 자기 집이 자기 집이 아닌 상황에서 오는 비애를. 일요일 오후, 전쟁을 선포한 자답게 당당하게 현관문을 박차고 들어가지는 못하고, 개폐인의 몰골을 한 채 소심하게 집에 들어섰다. 거실에서 노는 아들녀석은 ‘누구세요?’ 하는 얼굴을 하고 있고, 와잎은 시선을 TV에 꽂은 채 미동도 없다. 어차피 이리 된 거 대차게 대처하자, 라고 맘먹자마자 아들녀석이 묻는다. “아빠, 어디 갔다 왔어?” 엄마가 문 안 열어줘서 찜질방에서 자고 왔어, 네가 나중에 결혼할 때는 안에서 잠가도 밖에서 열 수 있는 자물쇠를 필히 달도록 해,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냥 어디 좀 갔다 왔어”라고 둘러댈 수밖에.
냉전은 오후 내내 이어졌다. 서로가 서로에게 할 말은 아이의 입을 통해서 말 그대로 전해졌다. “윤재야, 아빠 언제 정신 차리느냐고 물어봐”라고 와잎이 말하면 아들녀석은 내게 “아빠, 엄마가 아빠 언제 정신 차리느냐는데?”라고 묻는 식이었다. 나도 질 수는 없지. “윤재야, 엄마부터 정신 차리면 아빠도 차린다는데 엄마는 언제 정신 차릴 거냐고 물어봐”라고 말했더니 너무 길었는지 아들녀석은 “엄마, 아빠가 엄마는 언제 정신 차리느냐고 그러는데?”라고 전달했다. 와잎은 득달같이 레이저를 쏘았다. 난 나도 모르게 메롱을 날렸다.
역사는 열전 이후 냉전을 거쳤건만 우리는 냉전 이후 열전을 거쳤다. 저녁 무렵, 참다 못한 와잎이 먼저 말을 걸었다. “야, 잘못을 했으면 네가 먼저 사과해야 하는 거 아냐?” 난 기다렸다는 듯 무심히 말했다. “그럼 어제 내가 한 건 사과가 아니라 부사냐?” 와잎은 “독이 든 사과먹고 정신줄 나갔냐”며 “나 지금 너무 힘드니까 생맥이나 먹자”고 했다. 네가 지금 너무 힘든 거랑 생맥이랑은 무슨 상관인지 잘 모르겠지만서도,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린다고 생각하며 따라나섰다. 도착한 곳은 인근 ‘ㅇ스테이크’. 와잎은 앉자마자 점원에게 물었다. “100분 무제한 생맥 이벤트 아직도 하죠?” 난 일이 꼬이고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윽고 주문한 폭립 안주와 주니어 메뉴, 그리고 생맥이 나왔다. 와잎은 휴대전화의 타이머(사진 참조)를 작동시키며 말했다. “마셔! 100분 동안 더 많이 먹은 사람 말대로 하기야~.” 야, 이건 불공평하잖아. 너를 위한 게임이잖아~라고 말하는 순간 와잎은 기도를 열고 생맥을 주입하고 있었다. 그래, 나도 이길 수 있어. 내 반드시 이겨서 문 안 열어주는 못된 버릇을 반드시 고쳐주리라. 난 기도와 식도를 동시에 열어 생맥을 온몸으로 받았다. 아들녀석은 늘 봐온 풍경이라서 그런지 아비와 어미의 생맥 배틀에는 관심도 없이 로보캅 폴리를 가지고 혼자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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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당 2잔씩 연거푸 4번을 주문하니 점원이 말한다. “그냥 피처잔으로 드릴까요?” 우리는 술을 들이켜며 눈짓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나온 피처를 잔에 따라 연방 마셨다. 우리 테이블을 쳐다보느라 지나가던 손님들이 서로 부딪치는 일도 있었다. 맥주잔으로 4잔, 1700cc 피처 6개를 먹으니 10분이 남았다. 마지막 피처를 주문했다. 점원은 ‘뭐, 이런 인간들이 있어?’라는 표정이었다. 미안하다, 우린 그런 인간들이다. 그렇게 1시간40분 동안 미친 듯이 마셨다. 성냥개비로 카운팅을 한 결과, 19잔 vs 15잔. 와잎의 승리였다. 전쟁은 그렇게 패배로 끝났다. 재판이 열렸다. 전범이 된 나는 다시는 개개지 않겠다고 항복 각서를 써야만 했다. 그날 이후 가혹한 전쟁도발 책임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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