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선유정수장이 있었다. 1978년 들어서 2000년까지 20년 넘게 서울 시민의 상수 공급지였다. 선유도공원은 새롭게 조성한 것이 아니라 이를 재활용했다. 지난 2002년 낡거나 허물어진 기존의 정수 시설에 녹지를 이식했다. 개장 초기에는 정수장 풍경이 두드러졌다. 10년 남짓 지나니 이제 자연이 우세하다. 시간의 어우러짐은 선유도공원만의 독특한 풍광이다. 서울의 어느 공원도 흉내 낼 수 없는 개성이 됐다. 유명세도 톡톡히 치른다. 기시감이다. 누구나 한 번쯤 가봤다 여긴다. 하지만 눈에 익다고 발에 익은 것은 아닐 터. 미로처럼 들고 나는 산책길은, 바람의 언덕을 거닐며 맞는 강변의 생기는 오로지 걸음의 몫이다. 특히 밤의 정취는 선유도를 몇 차례 다녀본 이들만이 안다. 기시감으로는 알 수 없는 비밀의 정원이다. 더구나 여름의 끝자락이다. 슬며시 선유도공원을 권하는 이유다.
늦은 여름밤의 선유도공원은 단연 서울의 으뜸이다. 길의 운치도 있고 화려한 볼거리도 더한다. 굳이 주말까지 기다릴 까닭도 없다. 평일 저녁으로도 족하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다녀올 수 있는 가벼운 거리다. 첫 발자국은 선유교의 노을이다. 선유교는 한강 북단에서 선유도로 진입하는 다리다. 시원스런 시야는 한강을 드넓게 품는다. 또한 밤에는 색색의 조명이 어려 무지개다리라 불린다. 선유도의 야경 가운데 첫손에 꼽는다. 다만 다리 위에서는 해 질 녘의 풍경이 먼저다. 당인리발전소의 굴뚝 사이로 넘어지는 석양은 도시의 혈색이다. 도심에서만 마주할 수 있는 일몰이다. 한강으로 번지는 붉은 기운은 야경에 앞선 선유도의 저녁 인사다.
해 진 뒤에는 머물러 쉼도 좋고 산책도 좋다. 쉼터로는 선유도 북단의 카페테리아 나루나 선유정을 권한다. 공원 곳곳이 쉼터다만 조금은 편하게 머물며 휴식할 수 있다. 요기도 이뤄진다. 가족 단위 방문객은 환경물놀이터 주변에서 아이들과 논다. 한가로이 오갈 수 있는 너른 터다. 연인들은 시간의 정원을 산책한다. 선유정수장의 제1침전지가 있던 자리다. 사방으로 격자 모양의 콘크리트 골격이 남았고, 그 틈새로 덩굴원, 색채원, 소리의 정원 등이 있다. 큰길의 샛길로는 적당히 어둠이 스며 가볍게 애정을 표하는 이들도 눈에 띈다. 달빛 고운 밤에 한층 그윽하다. 상단의 북쪽 수로변에도 산책로와 쉼터를 꾸몄다. 조명이 발 아래로 눈을 맞춰 연인들이 짝을 지어 모인다. 디자인서울갤러리 앞에는 녹색 기둥의 정원이다. 담쟁이들이 지붕 없는 콘크리트 기둥을 감싸고 올랐다. 조명이 비출 때면 초록빛이 이채롭다. 그 밖에도 숨은 장소가 많다. 수생식물원에서는 얕은 빛 사이로 수련이 수줍게 웃겠다. 미루나무 터널은 밤에 더 호젓하겠다. 여의도와 한강변의 야경은 물어 무엇할까.
어둠이 깊어질수록 뒷걸음질치는 더위를 쫓는 재미도 쏠쏠하다. 서늘한 공기와 시원한 강바람에는 이른 가을 냄새도 난다. 되새김질하는 선유(仙遊)다. 이름처럼 신선이 노닐던 절경이다. 겸재 정선은 양천 현감으로 재직하며 그 풍경을 등에 담았다지. 선유도에 선유봉과 모래사장이 있던 시절이다. 그 풍경은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사라졌다. 한강의 제방을 쌓고 여의도비행장을 건설하는 데 자재로 쓰였다. 지금은 물을 테마로 한 재생의 생태공원이다. 그리고 옛사람은 가질 수 없던 여름밤의 서정이 옛 영화를 대신한다. 몰라서 놓치는 것이 아닌 익숙해 쉬이 지나치는 서울의 낭만이다. 공원은 자정까지 개방하니 이 모두를 찬찬히 누려볼 일이다. 그래도 못내 아쉽다면 합정역 8번 출구 인근의 仙술Zip(02-335-4764)에서 술잔을 기울여봄직하다. 테이블이 4개인 아담한 술집이지만 규모로 가늠할 수 없는 맛집이다. 근처 양화정(02-323-5777)의 숯불갈비도 유명하다.
박상준 저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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