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지나지 않는 철로에는 ‘칙칙폭폭’ 하며 노는 아이들이 있다. 카메라를 메고 한가로운 풍경을 찾는 출사족이다. 기찻길은 그것이 어딘들 아련한 기억 한 자락을 불러낸다. KTX가 서울과 부산을 2시간30분 만에 오가도 굳이 무궁화호에 몸을 싣는 이가 있듯, 팍팍한 생활은 느릿하고 여유로운 풍경에 시선을 두게 만든다. 하물며 서울의 기찻길이다.
서울 구로구 항동에는 기찻길이 남았다. 오류동에서 부천을 잇는 오류선 철로다. 원래 KG케미컬(옛 경기화학공업주식회사)의 운송선이었다. 1959년에 준공했으니 반세기 남짓이다. 이제 기차는 거의 다니지 않는다. 잦은 사람의 걸음만이 철길 위에서 철도를 추억한다. 살아 있는 철도박물관이다. 조금만 귀기울여도 서울에는 낡은 흑백사진 같은 풍경이 많다.
지하철을 이용하면 7호선 천왕역 2번 출구로 나온다. 철길 차단기가 나올 때까지 10분 정도 걷는다. 차단기 앞에서 왼쪽 오류동을 향한다. 철로와 나란한 길은 여느 골목과 다르지 않다. 동네 주민 여럿이 일상처럼 오간다. 오토바이도 철도 곁의 샛길을 달린다. 길옆으로는 높은 아파트가 단지를 이룬다. 반대편 길가로는 보통의 주택 단지다. 그 사이의 벽면을 따라 기찻길과 이동로가 나란하다. 철길에 웃자란 풀들은 운송이 아닌 산책의 길을 말한다. 기억 속에 낯익은 풍경도 현실로 마주하니 낯설고 신비롭다. 괜스레 길쭉한 철로의 쇳덩이를 손으로 쓰다듬는다. 옛일을 떠올려 귀를 가져댄다. ‘웅웅’거리는 소리다. 철길은 늘 위험한 장난 터였나. 언제 올지 모를 기차를 피해 어떤 꿍꿍이를 가졌던가. 철로 위에서 외줄 타듯 걸음을 내던 놀이도 그 때문에 한층 짜릿했겠지.
기찻길은 주택가를 벗어나자 작은 동산 사이를 가른다. 200m 정도의 구간은 항동기찻길의 백미다. 그것은 기차를 타고 지날 때 빈번하게 등장하는 시골의 숲이다. 그냥 지나치기 못내 아쉬웠던지 유독 걸음을 멈춰선 이가 많다. 한장 한장 카메라에 기억을 담는다. 판자촌을 가로지르는 군산 경암동이나 상가 앞을 오가는 목포의 삼학로 못지않은 항동기찻길만의 매혹이다. 자연이 있어 더 다정하다. 웃자란 나무들은 머리 위로 지붕을 만들어 터널을 꾸민다. 그 아래 길을 따라 끝의 소실점을 향해 길게 뻗은 철도의 위용이다. 길의 좌우로는 허리 높이의 낮은 옹벽을 쌓았다. 그마저도 시간이 쌓였다. 짙게 자란 이끼의 무리다. 벽을 초록으로 물들인다. 그윽한 철길의 멋이다.
숲을 지나니 산자락에 가려졌던 너머의 마을이다. 불과 한두 해 전만 해도 철길의 오른쪽에 너른 논밭이 있었다. 가을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벼들이었다. 서울에서 논농사 풍경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토지였다. 논과 논 사이의 오솔길은 항동저수지까지 이어졌다. 서울의 유일한 무료 낚시터였다. 길의 초입에는 원두막이 있었다. 초가의 그늘 아래 오후의 낮잠을 즐기곤 했다. 기찻길보다 그 경치를 찾아오는 이도 많았다. 서울의 목가적 풍경. 이제는 지난 일이다. 그 자리에 푸른수목원이 들어선다. 논밭은 사라지고 공사가 한창이다. 빈자리를 코스모스와 해바라기가 대신한다. 그나마 꽃의 향기라도 남아 다행이다. 기찻길은 침목으로 이뤄진 다리까지 또 한참을 더 이어진다. 주변에 맛집은 많지 않다. 항동원조순두부집(02-2684-3152)이 무난하다. 기찻길과 어울리는 운치를 지녔다. 순두부정식 외에 닭볶음탕 등을 낸다. 그보다 도시락 하나 싸서 떠나면 더없는 행복이다. 굳이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까. 옹벽 위에 앉아 김밥에 탄산수 한 병 즐겨도 좋겠다.
박상준 저자
*‘히든스폿’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히든스폿’을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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