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정훈, ‘불온한 인권’, 후마니타스, 2025년
다른 학문과 구별되는 역사만의 특징이 있다면 아마 모든 것을 시간 속에 놓고 바라본다는 점일 터다. 이는 단순히 과거를 중요히 여긴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역사는 그게 무엇이든 자연히 주어진 것,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긴 흐름 가운데서 대상의 변화와 지속, 연속과 단절을 고민한다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강점이다.
비록 역사학자가 쓴 책은 아니지만, 정치철학자 정정훈의 ‘불온한 인권’(후마니타스, 2025) 역시 인권을 ‘역사적으로’ 사고하고자 한다. 지은이는 “인권을 정치화하지 말라!”는 말이야말로 가장 반인권적이라 여긴다. 인권을 초역사적인 규범으로 박제해버림으로써 그 안에 깃든 역사성을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권의 역사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권을 구성하는 다양한 권리가 어떤 맥락과 정황, 권력관계의 틀 속에서 만들어졌는지 탐구하는 일이다. 인권에는 숱한 사회적 갈등과 투쟁의 흔적이 남아 있고, 그렇기에 정치적이다. 인권을 역사화하는 작업이 불온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천부인권’은 그 이름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 최초로 인권을 규범화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이라는 구체적 사건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다. 사건을 통해 인민은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며, 자신의 목소리를 국가 질서에 새긴다. 선언은 단순히 그런 일이 있었다고 알려주는 기념비에 그치지 않는다. 일단 기입되는 순간 선언은 규범이 되며, 배제된 이들이 주체화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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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제정 즉시 프랑스 식민지인 생도맹그의 노예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투쟁의 도구가 됐다. 그렇게 식민지 인민이, 노동자가, 여성이, 성소수자가 선언을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새로이 새겼다. 그 점에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마르크스주의자의 비아냥처럼 모호함으로 가득 찬 부르주아 남성의 지배 이데올로기만은 아니었다. 선언의 모호함은 오히려 수많은 피지배자로 하여금 새로운 상상을 가능하게 하고, 현실의 모순을 더욱 날카롭게 인식할 수 있게 하며, 끝내 선언을 다시 쓰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세월호 참사 1년 뒤인 2015년 12월10일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에 발표된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 역시 이런 ‘다시 쓰기’의 하나였다. 특기할 점은 안전이 선언 전면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푸코와 아감벤 등의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안전이란 생명을 관리하는 국가의 통치술에 불과하다며 냉소했다. 하지만 세월호와 이태원, 메르스와 코로나19를 지나온 한국에서 안전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4·16 인권선언’ 전문에 새겨진 안전은 시민 생명이 국가의 일방적 관리 대상이 아니며, 모두가 존엄이라는 기본적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4·16 인권선언’은 세월호라는 사건에 응답하고 책임지는 주체가 되겠다는 약속이다. 진정한 안전은 압제에 대한 투쟁과 함께 실현될 수 있다는 확인이자 세계의 다른 참사와 연대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그렇게 ‘4·16 인권선언’은 광화문과 이태원, 팽목항과 산재 현장에서 세월호를 역사적 사건으로,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위한 계기로 만들고자 거듭, 그러나 새롭게 쓰이고 있다. 인권이란 이토록 불온하고, 정치적이며, 무엇보다 역사적이다.
유찬근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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