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는 꽃에 대한 시샘이었나. 쉽사리 떠날 것 같지 않은 겨울이 마침내 자취를 감췄다. 어느새 가지마다 새순이다. 조심스러운 꽃망울이다. 봄이 간지럼을 태우니 발가락이 절로 꼼지락댄다. 괜스레 주말 날씨와 개화 시기만 살핀다. 꽃은 나무가 피우는 것이련만…. 봄은 그리 온다. 마음에 이는 바람 따라 기지개를 켠다. 머리에 꽃을 꽂고 들판을 뛰놀던 순백의 그녀들이 이해가 간다.
창덕궁과 창경궁의 생강나무가 꽃을 피웠단다. 봄날의 첫 꽃은 개나리로 알지만 서울의 봄은, 궁궐의 첫봄은 생강나무다. 여린 술 끝의 노란 꽃은 꽃대 없이 ‘톡’ 하고 터지듯 핀다. 새치름한 것이 제 몫의 계절을 닮았다. 뒤이어 경복궁 아미산 앵두나무와 덕수궁 석어당 앞 살구나무 꽃이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 4월 첫쨋주를 지날 때쯤은 말 그대로 ‘꽃대궐’이다. 가운데 이른 봄의 창덕궁을 찾는다. 창덕궁은 세계문화유산이다. 그 선정 이유가 잘 지은 궁궐 건축 때문이라고 아는 이가 많다.
그보다는 3분의 2가 넘는 응봉 자락의 산세와 궁궐 건축의 조화 덕분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유연함이다. 봄날의 생기야 말해 무엇할까. 게다가 낙선재 앞에는 매화 무리가 곱다. 서울에서 유일무이한 매화밭이다. 쉬이 이겨낼 수 없는 고혹이다.
창덕궁 낙선재 앞 매화밭은 30여 그루의 월영매(月影梅)가 꽃의 밭을 이룬다. 빛깔은 은은하고 생김은 다정하다. 가지에 무리지어 피니 그 풍성함이야. ‘달의 그림자’라는 이름이 괜스럽지 않다. 월영매 사이로는 간간이 홍매화가 붉다. 도드라지는 수줍음이다. 가히 봄날의 궁궐 풍경 중 으뜸이다. 그 사이를 걷는다. 너비야 전남 광양이나 섬진강의 매화에 비할까만 궁궐의 매화밭은 사군자의 오롯한 기운으로 뒤지지 않는다. 매화 너머에는 낙선재의 단아한 그림자도 들고 난다. 헌종이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지은 궁궐 안의 궁궐이다. 단청이 없어 봄날의 매화를 압도하지 않는다. 낙선재는 석복헌·수강재를 아우른다. 특히 수강재는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가 28년 동안 살다 생을 마감한 집이다. 그 신산스러운 삶이 깃들었다. 낙선재의 매화는 그녀의 애틋한 삶을 위로하는 듯하다.
매화가 만개하는 4월 초에는 뒤를 돌아볼 일이다. 언덕배기 삼삼와 앞에는 수양벚나무 한 그루가 섰다. 수양버들 가지에 벚꽃이 피는 형국이다. 땅을 향해 늘어뜨린 꽃자루 덕에 여느 벚나무보다 훨씬 화려하다. 수령으로 보아 광복 이후 심은 것으로 추정한다. 맞은편 성정각 자시문(資始門)의 홍매도 시선을 끈다. 400여 년 전 명나라에서 선조에게 보낸 만첩홍매다. 원줄기는 죽고 곁가지가 자라 꽃을 피운다. 꽃잎을 겹쳐 제 모양새를 뽐낸다. 이 또한 이채롭다. 그저 구중궁궐이려니 하지만 봄을 맞이하기에도, 봄을 만끽하기에도 명승이다.
창덕궁관리사무소에 문의하니 낙선재 앞 매화밭은 오는 4월1일부터 개방한다고 말한다. 막 꽃을 피우는 개화 시기일 것이다. 이른 봄기운이 궁금한 이는 오는 주말 창덕궁을 찾을 일이다. 다만 봄의 매혹을 견딜 만한 이는 일주일 정도 더 기다려도 좋다. 만개는 그때쯤이지 싶다. 꽃구경을 끝낸 뒤에는 안동칼국수를 권한다. 창덕궁 돌담길 따라 원서동 쪽으로는 비원칼국수(02-744-4848)와 안동손칼국수(02-765-0045, 일요일·공휴일 쉼)가 유명하다. 비원칼국수는 30년 역사를 자랑한다. 안동손칼국수는 몽양 여운형의 집터였던 장소다. 인근의 중국음식점 용정의 굴짬뽕도 별미다.
박상준 저자
*‘히든 스폿’은 우리 곁의 숨겨진, 그러나 빛나는 장소를 소개하는 칼럼입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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