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거리는 역시 제철이 으뜸이다. 맛도 좋고 몸에도 좋다. 여행 역시 제철의 풍경이다. 봄날에는 꽃이다. 그것이 매화든 벚꽃이든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한다. 여름 더위를 쫓기에는 그늘진 계곡이나 바다다. 가을은 단풍 든 산이 제격이고 겨울은 눈 내린 설경이다. 지나면 누릴 수 없는 찰나의 운치와 경치다.
가파도는 지난해 3월까지 최남단 마라도의 명성에 밀린 섬이었다. 올레길이 열리며 그 지형이 바뀌었다. 특히 4월 말에서 5월 초에 크게 들썩인다. 가파도 청보리축제다. 봄날의 보리는 갓 피어난 생명처럼 푸르싱싱하다. 올해는 지난 6∼8일에 열렸다. 예년보다 한층 붐볐다. 때마침 황금연휴였다. 게다가 한 달 앞서 한국방송 예능 프로그램 이 다녀갔다. 인파 속에서도 변함없는 들녘이었다. 옛날로 치면 보릿고개다. 곡식은 바닥나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은 시기. 아마도 그 푸른빛이 야속하기만 했겠다. 아득한 과거라지. 이제는 더없는 여행의 풍경이다. 보리의 푸름은 육체의 허기 대신 삶의 허기를 채운다. 그럼에도 벼와 보리의 들녘은 여전히 황금빛이 제철이라 믿는 촌스러움이라니. 어쩌랴, 그 풍요로운 빛깔이 늘 마음에 절절한 것을. 더불어 가장 먼저 찾아드는 수확의 풍경이고 보면 5월의 청보리 못잖게 진귀한 풍경이다.
가파도의 누런 들녘이 지층의 들뜸을 지그시 눌러 품는다. 사람의 축제는 저물었다만 보리의 축제는 막 시작인 것이다. 그 위로 느릿한 걸음을 낸다. 가파도의 행로는 올레길을 따라도 좋겠지만 굳이 목적일 까닭은 없다. 해안 둘레가 4.2km밖에 되지 않는 섬은 어디로 접어들든 그 땅을 고루 살피고 지난다. 넉넉잡아 3시간이며 족하다. 보리밭 사이를 지나다 마을로 접어들고, 마을에서 다시 보리밭으로 잇댄다. 길은 마음 닿는 곳에서 시작하고 열린다. 그 경계에는 보석 같은 돌담이다. 밭과 밭의 소유를 가르는 밭담이고 오밀조밀한 마을 사이로 난 길담이다. 어느 집 입구로 길을 대는 올레다. 제주의 돌담은 그 성긴 틈새로 바람을 눌러 안는다 했나. 바람은 그 빈틈으로 스며 들녘을 흔든다. 여린 하늘거림은 청보리와 황보리가 다르지 않다. 바람을 따라 눕고 바람이 지면 몸을 일으킨다. 하지만 황금의 보리는 맞서지 않으므로 알알의 결실을 놓지 않는다. 늦된 청보리 몇몇이 난데없이 삐쭉 고개를 내밀지만 그 또한 일말의 아쉬움을 위로한다. 바람이 연출하고 돌담과 들판이 출연한 영화 같은 풍광이다. 제주의 보리밭만이 가지는 아름다움이다. 풍요의 들녘에서 한층 또렷한 선의 유영이다. 그뿐이랴. 먼발치의 바다도 제주의 가파도를 부연한다.
이맘때의 들판과 바다는 푸름을 경쟁하지 않으므로 서로의 감성을 보완하고 조우한다. 한층 먼 데까지 가닿는 시계다. 그것은 본섬 제주의 모슬봉을, 산방산과 송악산을 선물로 안긴다. 본섬에 우뚝 선 한라산과 제주 남녘의 마지막 땅 마라도의 전경인들. 최고점이 20.5m밖에 되지 않는 섬이 제 몸을 낮춰 세상을 품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가파도의 들녘 위에 세워진 병풍이다. 돌담의 길목에서 바다의 둘레에서 우연처럼 마주한다. 스스로 옅어지므로 짙어지는 만개의 보리밭이다. 상동포구의 바다별장식당(064-794-6885)에서는 미감으로 그 풍경을 마감한다. 보리밥정식과 용궁정식을 낸다. ‘1박2일’이 위력을 발휘했다. 하동포구에서 가까운 가파도민박식당(064-794-7089)의 정식 또한 별미다. 주인이 물질을 나가 예약해야만 먹을 수 있다. 현지인에게 더 인기 있는 맛집이다. 구수한 보리의 향취가 마음에 이는 바람인 양하다.
제주=박상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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